겸리. 도원문진도. 옻 종이에 분채. 2015년 8월
<도원문진도>는 무릉도원을 찾아 떠나는 그림입니다. 즉 ‘도원문진(桃源問津)’이라는 제목은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무릉이라는 곳에서 어부가 도원으로 갈 수 있었던 계곡 입구를 물었다는 의미이며, 도연명(陶淵明, 365~427년)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주제로 합니다. <도화원기> 원문) 이와 같은 주제로 그린 조선대의 대표적 작품은 안견(安堅 :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 세종부터 세조 때까지 활동)의 <몽유도원도>가 있습니다. 겸리 주인장은 <몽유도원도>도 역시 그렸는데, 추후 이 블로그에 게재 예정입니다.
그림의 초입에서 <도화원기>의 주인공에 해당되는 어부가 배를 타고 잔잔한 계류를 거슬러 복숭아꽃이 핀 동굴 입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오른쪽 암벽의 키가 큰 소나무 무리와 거대한 바위 산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동굴 입구 쪽 바위 산의 암산의 윤곽선에는 청색을 사용하고 안쪽으로 갈수록 밝은 녹색을 가하여 골짜기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효과는 환상적인 유토피아인 도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도원문진도>는 어부가 커다란 동굴 속으로 흐르는 강물을 따라 배를 몰고 들어가는 장면과 그 위로 복사꽃이 만발한 이상 세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부는 이제 복사꽃이 피어있는 강(江)의 입구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이제 동굴을 통과하면 <몽유도원도>에서 묘사한 깊은 산골짜기의 기암괴석을 따라 무릉으로 향하는 험난한 노정이 나타날 것이며, 마침내 복숭아꽃 만발한 이상 세계에 도착하면 <십장생도>에서 묘사한 광경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렇게 <도원문진도>와 <몽유도원도>, 그리고 <십장생도>는 마치 무릉도원에 이르는 길을 순차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달한 세계는 조선시대 당시 선비들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이상 세계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비들은 주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운영하여 이상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도원문진도>를 비롯한 그림들은 이러한 선비들의 이상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된 그림들입니다.
<도원문진도>의 원작자는 조선 말기에서 일제시대까지 활약한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입니다.
안중식의 <도원문진도>. 1913년. 164.4×70.4㎝. 비단에 채색. 리움미술관
안중식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 화가였습니다. 그리고 오원 장승업의 화풍을 배워 산수, 인물, 화조, 영모(翎毛) 등 모든 유형의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또한 1902년 왕의 어진을 그리는 화사(畵士)로 선발되어 고종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궁중화가였습니다.
안중식은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과 함께 근대미술을 이끈 첫 세대 작가들을 배출하였는데, 훗날 대가로 성공하여 화단에 군림한 이상범,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최우석, 박승무 등이 두 사람의 문하생들이었습니다.
<도원문진도>는 안중식이 1913년도에 그린 작품입니다. 이때는 이미 조선(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궁중화가로서 특히 고종의 총애를 받던 안중식은 아마도 조선 선비들의 이상이 담긴 <십장생도>를 그림으로써 나라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을 토해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모든 정신과 얼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일제는 이미 <십장생도>를 그리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십장생도>와 같이 조선의 민중이 꿈을 갖거나 이상을 표현하는 작품은 제한을 가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궁중화가로서 활동하였던 안중식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즐겨 그렸던 <십장생도>로써 망하기 이전 조선시대를 회상하며 앞으로 다가올 이상 세계를 염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식민지 시대 나라 잃은 화원으로서 안중식은 <십장생도> 대신 이 <도원문진도>를 그림으로써 그의 염원을 표현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더욱 <도원문진도>는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하는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아꼈던 고종이 1919년 승하하자 안중식도 이해 생을 마감합니다. 이미 3·1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숱한 고문을 당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다 소모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도원문진도>는 안중식이 차마 몸을 일으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제국주의 통치 속에서 만들어진 서화협회(書畵協會 : 1918년 조직, 안중식은 서화협회의 회장이었음) 등을 통하여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 그가 행한 최소한의 나라를 위한 의식, 즉 그림으로써 표현한 그의 <독립운동도>였다고 생각됩니다.
겸리. 도원문진도. 옻 종이에 분채. 2015년 8월
<도원문진도>는 무릉도원을 찾아 떠나는 그림입니다. 즉 ‘도원문진(桃源問津)’이라는 제목은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무릉이라는 곳에서 어부가 도원으로 갈 수 있었던 계곡 입구를 물었다는 의미이며, 도연명(陶淵明, 365~427년)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를 주제로 합니다. <도화원기> 원문) 이와 같은 주제로 그린 조선대의 대표적 작품은 안견(安堅 : 생몰년 미상. 조선 초기 세종부터 세조 때까지 활동)의 <몽유도원도>가 있습니다. 겸리 주인장은 <몽유도원도>도 역시 그렸는데, 추후 이 블로그에 게재 예정입니다.
그림의 초입에서 <도화원기>의 주인공에 해당되는 어부가 배를 타고 잔잔한 계류를 거슬러 복숭아꽃이 핀 동굴 입구를 향하고 있습니다. 그 뒤에는 오른쪽 암벽의 키가 큰 소나무 무리와 거대한 바위 산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동시에 동굴 입구 쪽 바위 산의 암산의 윤곽선에는 청색을 사용하고 안쪽으로 갈수록 밝은 녹색을 가하여 골짜기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한 효과는 환상적인 유토피아인 도원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합니다. 이렇게 <도원문진도>는 어부가 커다란 동굴 속으로 흐르는 강물을 따라 배를 몰고 들어가는 장면과 그 위로 복사꽃이 만발한 이상 세계가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부는 이제 복사꽃이 피어있는 강(江)의 입구에 다다랐을 뿐입니다. 이제 동굴을 통과하면 <몽유도원도>에서 묘사한 깊은 산골짜기의 기암괴석을 따라 무릉으로 향하는 험난한 노정이 나타날 것이며, 마침내 복숭아꽃 만발한 이상 세계에 도착하면 <십장생도>에서 묘사한 광경이 펼쳐질 것입니다.
이렇게 <도원문진도>와 <몽유도원도>, 그리고 <십장생도>는 마치 무릉도원에 이르는 길을 순차적으로 표현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달한 세계는 조선시대 당시 선비들이 궁극적으로 이루어야 할 이상 세계의 염원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선비들은 주자 성리학을 바탕으로 나라를 운영하여 이상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도원문진도>를 비롯한 그림들은 이러한 선비들의 이상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현된 그림들입니다.
<도원문진도>의 원작자는 조선 말기에서 일제시대까지 활약한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입니다.
안중식의 <도원문진도>. 1913년. 164.4×70.4㎝. 비단에 채색. 리움미술관
안중식은 시서화(詩書畵)에 능한 조선의 마지막 문인 화가였습니다. 그리고 오원 장승업의 화풍을 배워 산수, 인물, 화조, 영모(翎毛) 등 모든 유형의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또한 1902년 왕의 어진을 그리는 화사(畵士)로 선발되어 고종의 화가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실력을 가진 궁중화가였습니다.
안중식은 소림(小琳) 조석진(趙錫晋 1853∼1920)과 함께 근대미술을 이끈 첫 세대 작가들을 배출하였는데, 훗날 대가로 성공하여 화단에 군림한 이상범,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최우석, 박승무 등이 두 사람의 문하생들이었습니다.
<도원문진도>는 안중식이 1913년도에 그린 작품입니다. 이때는 이미 조선(대한제국)이 망하고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고 있을 때입니다. 궁중화가로서 특히 고종의 총애를 받던 안중식은 아마도 조선 선비들의 이상이 담긴 <십장생도>를 그림으로써 나라를 잃은 백성의 서러움을 토해내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모든 정신과 얼을 말살시키고자 했던 일제는 이미 <십장생도>를 그리는 것을 금하고 있었습니다. <십장생도>와 같이 조선의 민중이 꿈을 갖거나 이상을 표현하는 작품은 제한을 가하고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궁중화가로서 활동하였던 안중식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즐겨 그렸던 <십장생도>로써 망하기 이전 조선시대를 회상하며 앞으로 다가올 이상 세계를 염원하였을 것입니다.
그러한 식민지 시대 나라 잃은 화원으로서 안중식은 <십장생도> 대신 이 <도원문진도>를 그림으로써 그의 염원을 표현하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래서 더욱 <도원문진도>는 애잔한 마음을 갖게 하는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신을 그토록 아꼈던 고종이 1919년 승하하자 안중식도 이해 생을 마감합니다. 이미 3·1 운동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일본 경찰에 끌려가 숱한 고문을 당해 정신적, 육체적 에너지가 다 소모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도원문진도>는 안중식이 차마 몸을 일으켜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싸우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제국주의 통치 속에서 만들어진 서화협회(書畵協會 : 1918년 조직, 안중식은 서화협회의 회장이었음) 등을 통하여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 속에서 그가 행한 최소한의 나라를 위한 의식, 즉 그림으로써 표현한 그의 <독립운동도>였다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