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리의 호랑이 그림들 1

관리자
2019-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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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古材)에 분채. 2014년. 오래된 나무 문짝에 그린 호작도입니다.


호랑이는 민화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소재 중의 하나입니다. 그것은 우리 민족이 오랫동안 호랑이와 가까이하고 있었던 정서적 유대감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겸리 주인장도 마찬가지로 호랑이를 매우 좋아하여 많은 호랑이 그림을 남겼습니다. 이 블로그에서는 겸리 주인장의 호랑이 그림들을 소개하면서 이와 더불어 호랑이에 얽힌 몇 가지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나라처럼 호랑이가 일반 민중과 가까웠던 민족은 아마도 없을 듯합니다. 호랑이는 사실 우리나라의 건국신화인 단군신화에서도 등장합니다. 물론 단군신화에 나오는 내용이 모두 사실은 아니지만 무릇 신화라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이야기가 아니라, 어느 정도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기도 합니다.

곰과 호랑이가 서로 인간이 되려고 경쟁하였던 것은 아마도 우리 민족이 형성되어 가는 역사의 여명기에 곰을 토템으로 받드는 부족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배하는 부족 사이의 투쟁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곰 부족이 호랑이 부족에게 승리하여 한민족이라는 민족의 원류가 탄생한 것으로 보는 주장도 있습니다. 호랑이가 우리에게 그토록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호랑이 부족에게 담겨 있던 호랑이에 대한 숭배 의식이라는 우리 민족의 초창기 DNA가 이어져 내려오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민족이 처음으로 호랑이를 그림의 소재로 삼았던 시기는 이미 수천 년 전 선사 시대의 울산 울주군의 반구대 암각화(국보 285호)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울산 울주군 대곡리 암각화에 새겨진 동물 그림들. 둥근 원 안에 호랑이 두 마리가 있습니다


둥근 원 부분 확대한 모습


암각화 사진의 둥근 원 부분을 따로 표시하면 왼쪽 사진과 같습니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줄무늬 호랑이와 점박이 표범이 함께 그려져 있습니다.


선사인들은 이렇게 바위에 그림을 새김으로써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식량을 위한 사냥과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공포의 동물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이 공동체의 장(場)에서 주술적인 행위를 하였을 것입니다.


사실 호랑이는 사냥의 대상이라기보다는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이는 이 땅에 사람들이 살던 시기부터 일제시기까지 이어오는 장구한 세월 동안 변치 않는 사실이었는데,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구한말 조선을 네 차례나 여행한 뒤 쓴 책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에서 “‘조선 사람은 일 년의 반을 호랑이를 쫓느라 보내고 일 년의 나머지 반을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사람의 문상을 가느라 보낸다’는 중국 속담이 거짓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당시 호환의 심각성과 조선인의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을 서술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신화·전설·설화에서 호랑이 이야기의 비중은 단연 세계 으뜸이어서, 중국의 문학가 루쉰(魯迅)은 “조선의 호랑이 이야기는 세계 어느 나라에 비해서 가장 다양하고 다채롭다”면서 조선 사람을 만나면 반드시 호랑이 이야기를 청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호랑이에 대한 풍부한 이야기가 조선시대에 들어와 더욱 풍부한 소재로 써 그림이라는 수단을 통해 유통된 것으로 보입니다.


호랑이가 등장하는 민화 중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까치와 함께 그려지는 이른바 호작도(虎鵲圖)입니다.


<호작도>. 옻 종이에 분채. 2015년


민화 <호작도>에는 보통 소나무가 있고, 가지 위에는 으레 까치가 앉아 있습니다. 그리고 민화 속에는 표범으로 그려진 것도 있고, 호랑이로 그려진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통상 호랑이와 까치, 그리고 소나무가 삼위일체로 한 그림에 그려진 것이 <호작도>의 특징입니다. 

하지만 <호작도>에는 일반적으로 호랑이가 아니라 표범이 등장합니다. 그 이유는 바로 <호작도>가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뜻 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줄무늬 호랑이보다는 표범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어로 표범 표(豹)는 소식을 알린다는 보(報) 자와 같이 '바오'로 발음되고,  까치는 한자로는 작(鵲)인데, 보통 까치가 울면 기쁜 소식이 온다고 해서 희작(喜鵲)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까치와 표범이 만나면 보희(報喜), 즉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하나의 문장이 되는 것입니다.

<호작도>. 옻 종이에 분채. 2015년


소나무는 정월(正月)을 뜻합니다. 그래서 소나무 위에 까치가 앉고 그 아래 표범이 있으면 신춘보희(新春報喜), 즉 새봄에 기쁜 소식을 알린다는 뜻이 됩니다. 그래서 이 그림은 보통 새해에 대문 앞에 한 해 동안 기쁜 소식이 많기를 바라면서 붙이던 것인데, 점차 그림의 원래 뜻이 잊혀지면서 표범과 호랑이가 서로 차이 없이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또 어떤 그림은 머리는 표범인데, 몸에는 호랑이 무늬를 그린 것도 있고, 꼬리만 표범인 것도 있습니다.

<호작도>. 2013년 작. 제18회 대한민국 중부 서예대전 삼체상 수상 작입니다. 몸통은 호랑이인데 꼬리가 표범입니다.



까치는 사람과 매우 친화적인 새인데, 이렇게 까치가 호랑이와 함께 그려지게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처음 중국에서 <호작도>가 그려질 때 그 뜻이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의미가 있기 때문 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옛날에 한 호랑이가 커다란 웅덩이에 빠졌는데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빠져나올 수 없게 되었습니다. 호랑이는 며칠 동안 배를 주리면서 자기를 구해줄 누군가 나타나기를 애타게 기다렸습니다. 사흘째 되던 날, 드디어 호랑이는 웅덩이 곁을 지나던 어느 나무꾼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이 배은망덕한 호랑이는 오히려 나무꾼을 잡아먹으려 하였습니다. 다급해진 나무꾼은 옆에 서있던 소나무와 지나가던 소에게 애원하며 호랑이를 달래줄 것을 간청하였지만 그들은 모두 호랑이에게 나무꾼을 잡아먹으라고 부추겼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무꾼은 까치에게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때 영리한 까치는 공정한 판정을 위해 호랑이에게 어떻게 해서 나무꾼이 구해주었는지 상황을 재현해 달라고 하자 어리석은 호랑이는 그 말을 듣고 다시 제 발로 웅덩이 속으로 들어갔고, 나무꾼은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후 인간과 까치는 친숙해지고, 호랑이를 골려주는 모습의 까치 호랑이 그림이 등장하였다고 합니다.

2015년 작. 까치가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호랑이를 골려주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이제 까치는 더 이상 나뭇가지에 얌전히 앉아 있는 모습이 아닙니다. 호랑이에게 바짝 다가가서 호랑이를 골려주는 것 같기도 하고,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민화 그림에서는 이와 같이 까치와 호랑이가 대립적인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위와 같은 설화에서도 기인하지만, 민화의 까치 호랑이가 단지 벽사나
길상의 의미를 넘어 더욱 상징적인 의미를 같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호작도>에서 호랑이는 바보 모습이나 몸통이 길게 풍자적으로 그려지기도 하는데 이는 당시의 사회 부조리를 풍자하는 성격을 가집니다. 즉 호랑이는 권력을 빙자하여 폭정을 자행하는 악덕 관리를 상징하고, 까치는 그런 관리에게 힘없이 당하는 일반 민중을 상징합니다.

2015년 작. 바보 호랑이는 바로 권력을 가진 관리를 상징합니다. 이런 호랑이를 두 마리의 까치가 공격하고 있습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 호랑이는 몸도 길쭉하고 무늬도 이상한 바보처럼 그려지고, 까치는 더욱 당당한 모습으로 나뭇가지에서 내려와 두 마리가 바보 호랑이를 협공하고 있습니다. 까치가 호랑이에게 대드는 모습이야말로 당시 민중들이 관리들의 횡포와 신분에서 오는 부당함과 차별에 항거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민중들은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이렇게 그림을 통해서나마 사회의 부조리를 해소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후기에 오면 이러한 까치 호랑이 그림과 더불어 호랑이를 골탕 먹이는 까치 설화가 매우 유행하게 됩니다.



사회의 부조리는 이런 호랑이의 모습을 통하여 민중들에게 반영되고, 이들을 공격하는 까치를 통하여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호랑이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호환(虎患)이라 하여 공포의 대상인가 하면, 산신으로 받들기도 하고, 때로는 사람으로 변한 호랑이와 애틋한 사랑을 나누는 설화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연암 박지원은 그의 소설 <호질(虎叱)>을 통해 호랑이로 하여금 양반 계급의 위선을 호되게 꾸짖기도 하였습니다.

많은 호랑이 그림들이 악귀를 쫓는 벽사의 의미로 민가에서 선호되었고, 그러한 호랑이와 인간의 교감은 담배를 피우는 호랑이의 모습에서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2015년 5월 한국민화뮤지엄 주관 제1회 한국민화대전 특선 작입니다.


금강산 호랑이가 담배 피우는 시절의 옛이야기처럼 구수하고 정감있게 그려진 위의 그림은 인간과 가까운 호랑이의 모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담배 피우는 호랑이 역시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어 권세를 가진 관리를 상징하고 그 옆에서 힘없는 민초를 상징하는 토끼가 담배 피우는 것을 시중들고 있습니다. 이 둘 사이의 갈등관계가 불평등한 신분관계를 풍자하고 있다면, 그 옆에는 적극적으로 까치가 바보호랑이를 공격하고 있어, 많은 것은 생각해 주고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호랑이 그림은 그것을 수용하는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지고 수요 되었고, 또 필요에 따라 하나의 그림이라도 벽사와 길상, 풍자가 서로 섞여가며 감상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래 그림은 어린이들에게 병이 걸리지 말라고 걸어 두었던 그림입니다

아기 호랑이가 그려진 <호작도>



이러한 까치 호랑이 그림은 그 원류가 중국입니다. 중국에서는 원나라 이후 호랑이 그림에 까치가 등장하기 시작하여 유행하게 되었고, 이것이 임진왜란 시기를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까치 호랑이 그림이 중국, 특히 원나라를 이은 명나라풍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으나 이후 점차 우리나라 고유의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비로서 단원 김홍도에 와서야 완전히 한국적 호랑이 그림이 정착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민화에서 호랑이 그림의 전형적인 형식, 곧 배경을 생략하고 화면의 위쪽에 소나무 가지만 멋들어지게 걸치며 호랑이를 크게 부각시킨 그림의 구도를 김홍도가 정작시킨 것입니다. 소나무의 굵은 가지가 화면 상단을 가로지르고, 거기서 작은 가지 하나가 경쾌하게 아래로 뻗어내리는 간단한 구도 속에 호랑이를 배치한 전형이 완성된 것입니다. 

중국의 호랑이가 아니라 우리의 호랑이, 중국식 화풍이 아니라 우리의 화풍과 구도로 마치 살아 있는 호랑이를 묘사한 것처럼 터럭 하나까지 극사실주의로 묘사한 진정한 한국적 호랑이 그림의 탄생이고, 이것이 단원의  호랑이 그림이 천하명품이라는 극찬을 받고 까닭입니다.

단원의 <송하맹호도>를 임모한 겸리의 2017년 작. 옻 종이에 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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