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수당진찬도>. 옻 종이에 분채 152x 63.5cm
행차 5일째 되는 날인 윤 2월 13일 이번 행차의 가장 큰 행사인 진찬례(進饌禮), 즉 혜경궁의 회갑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림 맨 위쪽이 봉수당, 가운데가 중양문(中陽門), 맨 아래 지붕만 보이는 것은 좌익문(左翊門)입니다.
잔치는 오전 8시 45분 경인 진정(辰正) 3각에 봉수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혜경궁의 자리는 행궁 내전의 북벽에 남쪽을 향해서 놓여졌는데, 앉을 자리에는 연꽃무늬 방석이 깔리고 뒤에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쳐졌습니다.
혜경궁 자리 세부도.
정조자리 세부도
위의 세부도에서 혜경궁의 자리는 봉수당 안쪽에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십장생도로 보이는 병풍으로 혜경궁이 위치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혜경궁의 맞은편인 동쪽에 배치되었으며, 왕의 자리에는 표피 방석이 깔리고, 뒤에는 진채 병풍이 놓였습니다.
정조의 자리도 왕은 없고 방석과 병풍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궁들이 이리저리 준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봉수당진찬도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봉수당진찬도에는 혜경궁 자리의 병풍은 없고, 정조 자리의 병풍은 방석 뒤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앞뜰에는 혜경궁의 친척과 척신들이 있고, 중양문 밖에는 문부 백관들이 앉아 있습니다.
혜경궁이 상궁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침내 예식은 시작되었고, 이어서 왕이 융복을 입고 자리로 가 앉았는데, 혜경궁과 왕이 등장할 때 여민락이 연주되고, 자리에 앉자 향불이 피어오르고 음악은 중지됩니다.
상궁의 구호에 따라 내외 명부가 먼저 혜경궁에게 절을 하고 이어서 의빈과 척신이 뒤따릅니다. 그러고 나서 왕이 여 집사의 인도를 받아 재배하자 의빈, 척신, 백관들도 왕을 따라 재배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음악(여민락과 낙양춘곡)이 연주됩니다
다음에 음식상과 꽃, 술잔을 드리는 의식이 진행되고 이어 왕과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음식상과 꽃이 전달됩니다.
이어 혜경궁에게 모두 7번의 술과 탕이 올려지는 데 매번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이 달리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공연을 위하여 서울과 화성에서 선발된 33명의 여령(女伶, 즉 기생)들과 46명의 악사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혜경궁의 친인척 내빈 13명, 외빈 69명이 초대받았고, 각 영에서 차출된 군사들은 모두 7,716명인데, 이들 모두에게도 음식이 제공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736명입니다.
화면 가운데에는 여령들이 무고(舞鼓)와 선유락(船遊樂)을 추고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장면들이 함께 그려진 것입니다.
무고와 선유락 등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는 장면 세부도
이 중에서 특히 눈 길을 끄는 것은 화면 중앙의 배를 가운데 놓고 주위를 도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유락인데, 궁중에서 선유락이 공연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이 진찬례에서 선유락이 공연된 이후 궁중 연회에서 선유락은 매우 인기 있는 종목이 되었다 합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는 선유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채선을 설치하고, 여러 기녀들이 나누어 서서 배 떠나는(行船) 모습을 한다. 닻줄을 끌면서, 배를 둘러서서 춤춘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즉 선유락은 신라 때 만들어졌는데, 사신이 뱃길로 사행을 떠날 때 바닷가에서 전송하는 모습을 여러 기생들이 연출하여 선유락이라는 놀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잔치가 끝나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날의 의식이 실로 천년 만의 처음 있는 경사라고 치하하였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준비한 관리와 출연한 여령들, 그리고 수행한 관리들에게 푸짐한 상을 내리고 특별히 화원들을 불러 진찬도 병풍을 제작하게 하였습니다. 병풍은 대병(大屛)과 중병(中屛) 두 종류를 만들었는데, 대병은 모두 16좌, 중병은 모두 5좌를 만들어 대병 3좌와 중병 3좌는 궁에 바치고, 나머지는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진찬도 병풍은 현재 소장처가 불명합니다.
병풍을 그리는 데 참여한 화원은 김득신 등 7명으로 <화성능행도>를 제작한 화원과 동일합니다.
화성성역의궤 중의 봉수당도
봉수당 건물은 정조 13년(1789) 완공되었습니다. 진찬례에서 혜경궁은 거처인 장락당(長樂堂)에서 봉수당으로 이동해 정조의 잔을 받게 되었는데, 정조는 혜경궁이 건물을 이동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봉수당과 장락당을 서로 통하게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봉수당과 장락당은 두 건물의 벽과 지붕이 한쪽 모서리에서 맞붙어 있는 매우 특이한 구조입니다(위의 사진에서 봉수당 좌측 위에 붙어 있는 건물입니다. 희미하게 장락당이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라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습니다.
봉수당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고, 1997년 복원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복원된 봉수당에서 혜경궁의 진찬례를 재현한 것입니다.
혜경궁 진찬례 재현 모습
리움 박물관 소장 <봉수당진찬도>
<봉수당진찬도>. 옻 종이에 분채 152x 63.5cm
행차 5일째 되는 날인 윤 2월 13일 이번 행차의 가장 큰 행사인 진찬례(進饌禮), 즉 혜경궁의 회갑잔치가 열렸습니다.
그림 맨 위쪽이 봉수당, 가운데가 중양문(中陽門), 맨 아래 지붕만 보이는 것은 좌익문(左翊門)입니다.
잔치는 오전 8시 45분 경인 진정(辰正) 3각에 봉수당에서 거행되었습니다. 혜경궁의 자리는 행궁 내전의 북벽에 남쪽을 향해서 놓여졌는데, 앉을 자리에는 연꽃무늬 방석이 깔리고 뒤에는 십장생 병풍이 둘러쳐졌습니다.
혜경궁 자리 세부도.
정조자리 세부도
위의 세부도에서 혜경궁의 자리는 봉수당 안쪽에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다만 십장생도로 보이는 병풍으로 혜경궁이 위치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혜경궁의 맞은편인 동쪽에 배치되었으며, 왕의 자리에는 표피 방석이 깔리고, 뒤에는 진채 병풍이 놓였습니다.
정조의 자리도 왕은 없고 방석과 병풍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상궁들이 이리저리 준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 봉수당진찬도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봉수당진찬도에는 혜경궁 자리의 병풍은 없고, 정조 자리의 병풍은 방석 뒤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앞뜰에는 혜경궁의 친척과 척신들이 있고, 중양문 밖에는 문부 백관들이 앉아 있습니다.
혜경궁이 상궁들의 안내를 받으며 마침내 예식은 시작되었고, 이어서 왕이 융복을 입고 자리로 가 앉았는데, 혜경궁과 왕이 등장할 때 여민락이 연주되고, 자리에 앉자 향불이 피어오르고 음악은 중지됩니다.
상궁의 구호에 따라 내외 명부가 먼저 혜경궁에게 절을 하고 이어서 의빈과 척신이 뒤따릅니다. 그러고 나서 왕이 여 집사의 인도를 받아 재배하자 의빈, 척신, 백관들도 왕을 따라 재배합니다. 이 모든 과정에서 음악(여민락과 낙양춘곡)이 연주됩니다
다음에 음식상과 꽃, 술잔을 드리는 의식이 진행되고 이어 왕과 다른 참가자들에게도 음식상과 꽃이 전달됩니다.
이어 혜경궁에게 모두 7번의 술과 탕이 올려지는 데 매번 연주되는 음악과 무용이 달리 규정되어 있습니다. 이 공연을 위하여 서울과 화성에서 선발된 33명의 여령(女伶, 즉 기생)들과 46명의 악사들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혜경궁의 친인척 내빈 13명, 외빈 69명이 초대받았고, 각 영에서 차출된 군사들은 모두 7,716명인데, 이들 모두에게도 음식이 제공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736명입니다.
화면 가운데에는 여령들이 무고(舞鼓)와 선유락(船遊樂)을 추고 있는데, 이는 서로 다른 장면들이 함께 그려진 것입니다.
무고와 선유락 등 연회가 베풀어지고 있는 장면 세부도
이 중에서 특히 눈 길을 끄는 것은 화면 중앙의 배를 가운데 놓고 주위를 도는 장면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유락인데, 궁중에서 선유락이 공연된 것은 이때가 처음입니다. 이 진찬례에서 선유락이 공연된 이후 궁중 연회에서 선유락은 매우 인기 있는 종목이 되었다 합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서는 선유락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채선을 설치하고, 여러 기녀들이 나누어 서서 배 떠나는(行船) 모습을 한다. 닻줄을 끌면서, 배를 둘러서서 춤춘다. 세상에 전하기를 신라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즉 선유락은 신라 때 만들어졌는데, 사신이 뱃길로 사행을 떠날 때 바닷가에서 전송하는 모습을 여러 기생들이 연출하여 선유락이라는 놀이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잔치가 끝나고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이날의 의식이 실로 천년 만의 처음 있는 경사라고 치하하였습니다. 그리고 잔치를 준비한 관리와 출연한 여령들, 그리고 수행한 관리들에게 푸짐한 상을 내리고 특별히 화원들을 불러 진찬도 병풍을 제작하게 하였습니다. 병풍은 대병(大屛)과 중병(中屛) 두 종류를 만들었는데, 대병은 모두 16좌, 중병은 모두 5좌를 만들어 대병 3좌와 중병 3좌는 궁에 바치고, 나머지는 관리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 진찬도 병풍은 현재 소장처가 불명합니다.
병풍을 그리는 데 참여한 화원은 김득신 등 7명으로 <화성능행도>를 제작한 화원과 동일합니다.
화성성역의궤 중의 봉수당도
봉수당 건물은 정조 13년(1789) 완공되었습니다. 진찬례에서 혜경궁은 거처인 장락당(長樂堂)에서 봉수당으로 이동해 정조의 잔을 받게 되었는데, 정조는 혜경궁이 건물을 이동하는 불편을 줄이기 위해 봉수당과 장락당을 서로 통하게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봉수당과 장락당은 두 건물의 벽과 지붕이 한쪽 모서리에서 맞붙어 있는 매우 특이한 구조입니다(위의 사진에서 봉수당 좌측 위에 붙어 있는 건물입니다. 희미하게 장락당이라는 글씨가 보입니다)
정조는 혜경궁의 장수를 기원하며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라는 뜻의 봉수당이라는 당호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 하였습니다.
봉수당은 일제 강점기에 파괴되었고, 1997년 복원되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복원된 봉수당에서 혜경궁의 진찬례를 재현한 것입니다.
혜경궁 진찬례 재현 모습
리움 박물관 소장 <봉수당진찬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