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능행도 이야기(8) -환어행렬도(한양으로 돌아오는 의장행렬)

관리자
2019-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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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어행렬도>. 옻 종이에 분채. 152x63.5cm

윤 2월 15일 아침 8시 45분경 왕의 행렬은 화성행궁을 떠나 시흥을 향해 출발하였습니다.  어가가 중양문을 거쳐 좌익문, 신풍루를 지나 장안문 밖에 이르자 이곳에서 문무과 별시에 합격한 사람들이 꽃모자를 쓴 무동(舞童)들을 데리고 맞이하였습니다.


행궁을 출발한 지 5리쯤  지나 혜경궁의 가마가 진목정(眞木亭)에 이르자 잠시 휴식을 가졌는데, 이때 왕은 미음과 다반을 혜경궁에게 올렸습니다.


혜경궁의 가마가 진목정교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는 모습의 세부도. 가마는 휘장에 가려져 있습니다.


진목정은 현재 수원시 정자 1동 295번지 백조 아파트 앞 얕은 고개를 말합니다. 당시에는 진목현의 참나무 고개에 있던 정자였는데 진목이라는 지명도 참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입니다. 참고로 수원의 정자동(亭子洞)이라는 지명도 이 진목정이라는 정자가 있는 동네라는 데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위의 세부도를 보면 혜경궁의 가마가 보이고 가마를 에워싼 행렬의 바깥쪽에 수라를 실은 수레와 음식을 준비하는 임시 장막인 막차(幕次)가 보입니다.  막차에서 음식을 준비하면 왕은 기수대의 거대한 용이 그려진 기 앞쪽의 왕의 가마에서 내려 그 음식을 가마 안의 혜경궁에게 친히 올렸을 것입니다.

거대한 용기(龍旗) 앞에 있는 왕의 가마 세부도


<환어행렬도>는 이렇게 혜궁궁이 휴식을 취하는 모습과 화성행궁을 출발한 행렬이 막 시흥행궁에 도착한 모습이 함께 있는 작품입니다.


잠시 휴식을 취한 후 다시 행차를 시작한 어가 행렬은 이어 오늘날 수원시와 의왕시의 경계인 미륵현(彌勒縣)에 도착하였습니다. 미륵현은 고개 정상에 미륵당이 있어 그렇게 불렸는데, 이 고개를 넘으면 화성과 현륭원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것이 아쉬웠던지 정조는 신하들에게 이 미륵 고개에 오면 떠나기 싫어 거둥을 멈추고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방황한다며 이 고개의 이름을 '지지대(遲遲臺) 고개'라고 이름 지으라 하고 그 이름을 새겨 표지석도 세우라고 명합니다.

이리하여 이곳에 장승과 표석을 세웠고, 1807년(순조 7)에 지지대 서쪽에 지지대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이 비는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지대비 (遲遲臺碑). 시도유형문화재 제24호.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소재. 사도세자 능을 참배하고 돌아갈 때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여 이곳에서 한참 지체하였던 데서 비롯되었고, 지금도 이 고개는 지지대고개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점심 무렵 행렬은 사근평 행궁(肆覲坪行宮. 현재 의왕시청 별관 자리)에 도착하여 이곳에서 암행한 신하들을 통해 백성들의 고통과 폐단을 파악한 후 혜경궁과 점심을 먹고 사근평 행궁을 출발하였습니다.


안양교 앞에 이르자 잠시 휴식을 취하여, 왕은 혜경궁에게 미음과 다반을 드렸고, 대박산(大博山, 지금의 석수 전철역 부근) 앞 벌판을 지나 저녁 무렵에 시흥행궁에 도착하였습니다. 왕은 먼저 행궁에 도착하여 시설을 점검한 뒤에 혜경궁을 맞아들이고 저녁을 올렸습니다.

시흥행궁 세부도. 


위의 그림을 보면  산자락 아래 병사들의 삼엄한 호위에 둘러싸인 행궁이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시흥행궁은 행차 첫날을 지낸 곳이기도 합니다. 시흥행궁은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대략 지금의 금천구 시흥 5동 동사무소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는 시흥 사거리에서 벽산아파트 방향으로 조금 들어가면 나오는 은행나무 사거리입니다) 이 행궁은 이번 행사를 위해 새로 지었으나 현재 행궁은 없어지고, 그 부근에 있던 약 800년 된 은행나무 몇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시흥행궁이 있던 자리의 현재 모습. 은행나무와 시흥 현령 선정비가 보이고 있습니다. 


시흥행궁은 정조가 화성 행차 시에는 반드시 들렀던 곳으로 행차 첫 날인 1795년 윤 2월 9일 처음 하룻밤을 보내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이날 윤 2월 15일, 그리고 4년 후인 1797년 1월 29일, 같은 해 8월 19일 등 모두 4번에 걸쳐 행궁에  머물렀습니다.


처음 화성 행차 시에는  사당동 쪽의 남태령 고개를 통해 넘어갔지만, 그 길이 왕이 지나기에는 좋지 않아서 다음 해부터 현재 시흥동으로 길을 변경했다고 전해집니다. 따라서 시흥 관헌이 있던 시흥동 지역에 행궁을 정했던 것입니다.


 왕의 화성 행차 시 중간 숙박지로 탄생한 시흥 행궁은 우리나라 1번 국도가 탄생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또한 서울에서 수원까지 가는 길이 이 시대부터 이용되었다는 것을 뜻합니다. 

어가 행렬을 위해 도로를 정비한 것이 바로 1번 국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진목정이 표지 되지 않았지만 지지대 고개부터 5km 지역의 소나무 지대인 노송지대에서 장안문 사이이며, 괴목정교는 지지대 고개 바로 밑에 있습니다. 


시흥행궁에 도착함으로써 이 날의 행차는 모두 마무리되었습니다. 


화성에서의 행사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시흥행궁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 〈환어행렬도〉는 1㎞가 넘는 장대한 행렬을 지그재그 식으로 상하 긴 화면에 압축하여 묘사하였습니다. 여기에 수행한 인원만도 6천 명이 넘었고, 1백여 명의 악대, 수백 개의 깃발과 가마행렬은 무려 1㎞나 되었습니다.

 그림에서는 신하와 군졸이 모두 1, 279명, 구경나온 백성들 583명으로 모두 1,862명이나 그려져 있습니다. <화성능행도> 중 가장 많은 인원이 등장합니다.


행궁에 막 도착한 선두 행렬이 주변에 대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고 기마대와 대기치들을 앞세우고 혜경궁의 가교와 말을 탄 정조 임금, 그 뒤로 수가하는 행렬이 아스라이 이어져 있습니다. 또한 주변의 아름다운 산세, 연도에 가득 밀집한 백성들, 정연한 대오를 갖춘 행렬이 장대하게 묘사된 그림입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이 장엄한 행렬과 대비되는 자유분방한 백성들의 모습과 그 사이사이에 보이는 엿장수, 떡장수 등의 모습입니다. 

행렬을 구경나온 백성들 모습의 세부도. 이 장소에서만 모두 7명의 장사하는 이들이 보이고 있어 가장 좋은 목인 것 같습니다.


이날의 행렬하는 모습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원행반차도〉, 규장각 소장 〈화성원행반차도〉, 『원행을묘정리의궤』의 〈반차도〉 등에  더욱 자세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들 행렬도에는 병풍에서는 파악하기 어려운 대열 편성 상태가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의 〈화성원행반차도〉는 45미터에 이르는 긴 행렬도로 6400여 명이 그려져 있어 실제 행렬에 가장 가깝습니다. 한편 규장각의 〈화성원행반차도〉와 의궤의 〈반차도〉는 1490여 명의 사람과 520 필 정도의 말이 등장하고 있어 실제 행렬의 20% 정도만 묘사되어 있습니다.



<화성원행반차도> 중 혜경궁 가마 행렬 부분. 중앙박물관 소장 화성성역의궤 중


 화성성역의궤 중 <화성원행반차도> 전체



리움 박물관 소장 <환어행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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