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사진을 보면, 두 개의 긴 채 아래로 줏대가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 외바퀴가 달려 있습니다. 채 위에 다시 채를 연결하고 그 위에 의자를 달았는데, 의자에는 등받이와 팔걸이가 달려 있으며 가죽으로 된 방석이 있습니다. 의자 앞에는 발판이 있고, 채의 앞쪽 아래에는 철제 사각 고리가 달려 있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이곳에 나무를 연결하여 두 사람씩 앞뒤로 잡고 갔습니다. 매우 정교하게 만든 가마임에 틀림없습니다.
초헌은 정 2품 이상의 관직만 이용할 수 있었던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고위 관리의 위세를 상징하였고, 보통 여섯 사람에서 아홉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움직였습니다.
물론 초헌은 좌석이 높게 올라 있어서, 초헌을 타는 관리의 집에는 솟을 대문과 함께 문턱을 없애 초헌을 타고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보통 5명이 초헌 하나를 메고 다님)이 동원되는 초헌의 비합리성을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이렇게 비판하였습니다.
"바퀴는 작으면서 수레 높이는 한 길이나 되어 탄 모양을 바라보면 사닥다리로 지붕에 오를 듯하니, 그 위태로움은 말할 수가 없다. 움직일 때는 다섯 사람이 아니면 안 되고, 또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 수레를 만든 것은 수레 하나로 사람 다섯을 태우려고 한 것인데, 지금 수레는 다섯 사람이 걷고 한 사람이 탄다."
삼국시대에는 수레의 이용이 활발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레 사용이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오히려 인간의 노동력이 더 필요한 방향으로 발전(퇴보가 더욱 정확한 단어일 듯)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박제가는 이 점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림의 제일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보이는데 이를 갈도(喝道)라고 합니다. 흔히 드라마 같은 곳에서 "물러서라 사또 나가신다"하며 선두에서 소리를 질러 행인들을 정리하는 사람입니다.
이 갈도가 왼손에는 쥘부채를 들고, 왼편에는 흰 보자기에 싼 물건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데, 이것이 안롱(鞍籠)입니다. 눈이나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우비인데, 두꺼운 기름종이(油紙)로 만들며 보통 사자를 그려 넣습니다.
초헌 앞에 엎드려 있는 사람은 마치 길에 있는 장애물을 치우는 역할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모당 홍이상 평생도>에서는 이 사람을 고과(告課)라고 표시하여 지금 판서에게 무엇인가를 고(告) 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 그림에는 초헌과 관련하여 흥미 있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6. 송도유수도임시(松都留守到任時) - 관찰사 부임
<송도유수도임시>
첫 벼슬길에 오른 후 이제 지방장관인 송도(개성) 유수로 임명되어 부임하는 길입니다. 개성유수는 보통 경기관찰사를 겸임하였기 때문에 이 그림의 부제도 '관찰사 부임'입니다
그림에서 보면 말 두 필을 앞뒤에 맨 가마(이러한 가마를 쌍교<雙轎>라고 합니다)를 타고 고개 너머 개성으로 부임하고 있고, 길가에는 행인들이 앉아 구경하고 있습니다. <한림겸수찬시>에 볼 때는 말을 타고 행차하였는데 이때에는 화려한 가마를 타고 그 앞에는 공식적인 행차에 따르는 행진음악을 연주하는 대취타(大吹打), 깃발 든 사령 등이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림의 순서로 보아 과거 급제 후 첫 벼슬인 한림겸수찬을 역임한 뒤 승진하여 개성유수로 부임한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습니다. 물론 <평생도>에서 모든 벼슬을 망라하여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모당 홍이상 평생도>라는 기준에 의해서 볼 때, 사실 홍이상 선생이 제일 마지막으로 한 벼슬이 바로 개성유수였습니다.
원래 서인(西人)이었던 홍이상 선생은 광해군 즉위 후 동인(東人) 계열의 대북(大北)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자 당시 대북의 세도가였던 이이첨(李爾瞻)·정인홍(鄭仁弘) 등에게 밀려나 개성으로 좌천되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후손들은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여 개성유수 시절의 모습을 <평생도>에서 제외하고자 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개성유수가 그의 마지막 벼슬이고, 또한 생의 마지막도 그곳에서 하였기 때문에 이 장면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다고 봅니다.
사실, 후에 노론이 권력을 장악하였을 때 돌이켜 보면 정적에게 좌천되어 멀리 떠나는 모습은 핍박받는 하나의 영웅적 장면으로 그려질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한 고통과 시련을 겪고 우리가 여기까지 왔다는 하나의 상징일 수도 있는 장면입니다.
그리고 그림의 순서는 아마도 관직의 직계 순으로 장황하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개성 유수의 품계가 정 2품인 경우도 있지만 통상 종 2품이었고, 병조판서나 좌의정은 그 위의 품계이므로 순서를 이에 맞게 하는 것이 바람직해 보였을 것입니다.
傳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중 송도유수도임시. 중앙박물관
7. 병조판서시(兵曹判書時) - 판서 행차
<병조판서시>
이제 드디어 판서가 되어 부임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은 외바퀴가 달린 가마를 타고 군졸들의 안내를 받으며 행차하고 있는데, 이 그림에는 흥미 있는 것들이 많이 보입니다.
우선 주인공이 타고 있는 가마인 초헌(軺軒)입니다. 초헌은 정 2품 이상의 벼슬아치만 탈 수 있는 가마입니다. 아마 조선시대 그림에서 초헌이 등장하는 그림은 이 그림과 더불어 김홍도의 그림이라고 전해지는 또 다른 평생도인 <담와 홍계희 평생도>, 그리고 19세 말의 화가인 김준근(金俊根)의 풍속화 정도인 것 같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에 조선시대의 초헌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초헌. 조선시대의 종2품 이상의 벼슬아치가 타던 수레.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위의 사진을 보면, 두 개의 긴 채 아래로 줏대가 연결되어 있으며 여기에 외바퀴가 달려 있습니다. 채 위에 다시 채를 연결하고 그 위에 의자를 달았는데, 의자에는 등받이와 팔걸이가 달려 있으며 가죽으로 된 방석이 있습니다. 의자 앞에는 발판이 있고, 채의 앞쪽 아래에는 철제 사각 고리가 달려 있어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이곳에 나무를 연결하여 두 사람씩 앞뒤로 잡고 갔습니다. 매우 정교하게 만든 가마임에 틀림없습니다.
초헌은 정 2품 이상의 관직만 이용할 수 있었던 데에서 알 수 있듯이 고위 관리의 위세를 상징하였고, 보통 여섯 사람에서 아홉 사람이 한 조를 이루어 움직였습니다.
물론 초헌은 좌석이 높게 올라 있어서, 초헌을 타는 관리의 집에는 솟을 대문과 함께 문턱을 없애 초헌을 타고 쉽게 드나들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한 사람이 움직이기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보통 5명이 초헌 하나를 메고 다님)이 동원되는 초헌의 비합리성을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이렇게 비판하였습니다.
"바퀴는 작으면서 수레 높이는 한 길이나 되어 탄 모양을 바라보면 사닥다리로 지붕에 오를 듯하니, 그 위태로움은 말할 수가 없다. 움직일 때는 다섯 사람이 아니면 안 되고, 또 반드시 따르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옛날에 수레를 만든 것은 수레 하나로 사람 다섯을 태우려고 한 것인데, 지금 수레는 다섯 사람이 걷고 한 사람이 탄다."
삼국시대에는 수레의 이용이 활발했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수레 사용이 이렇게 비합리적으로 오히려 인간의 노동력이 더 필요한 방향으로 발전(퇴보가 더욱 정확한 단어일 듯) 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박제가는 이 점을 비판한 것입니다.
그림의 제일 앞에서 길을 인도하는 사람이 보이는데 이를 갈도(喝道)라고 합니다. 흔히 드라마 같은 곳에서 "물러서라 사또 나가신다"하며 선두에서 소리를 질러 행인들을 정리하는 사람입니다.
이 갈도가 왼손에는 쥘부채를 들고, 왼편에는 흰 보자기에 싼 물건을 옆구리에 끼고 있는데, 이것이 안롱(鞍籠)입니다. 눈이나 비가 올 경우를 대비한 일종의 우비인데, 두꺼운 기름종이(油紙)로 만들며 보통 사자를 그려 넣습니다.
초헌 앞에 엎드려 있는 사람은 마치 길에 있는 장애물을 치우는 역할을 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모당 홍이상 평생도>에서는 이 사람을 고과(告課)라고 표시하여 지금 판서에게 무엇인가를 고(告) 하는 장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이 그림에는 초헌과 관련하여 흥미 있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傳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병조판서시. 중앙박물관
8. 좌의정시(左議政時) - 정승 행차
<좌의정시>
드디어 주인공이 정승인 좌의정이 되어 행차하는 장면입니다. 이제 벼슬의 끝까지 왔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정승이 되었으니 개인의 영예이자 가문의 영광입니다.
물론 모당 홍이상 선생은 좌의정까지 벼슬에 이르지는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평생도>는 개인 일생의 정확한 반영이라기보다는 그 염원을 바라는 마음이 담긴 그림입니다. 꼭 과거에 급제하지 않아도 <소과응시>와 <응방도(삼일유가)>를 그려 과거 급제하는 염원을 담았듯이 벼슬이 정승에 이르지 않아도 자손 중에 정승이 나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 그림을 놓고 기원하고 또 기원하였을 것입니다.
이 그림에서 좌의정이 된 주인공은 종 1품 이상과 기로소(耆老所)의 당상관(堂上官)만이 탈 수 있는 호피 방석이 깔린 평교자(平轎子)를 타고 행차하고 있습니다. 행렬의 선두와 중간에는 밤길을 밝히려고 횃불을 든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백마에서 초헌으로 그리고 이제는 평교자로 이동 수단이 계속 바뀌고 있습니다.
평교자는 앞뒤 두 사람씩 네 사람이 메는 교자로 낮게 어깨에 메고 천천히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좌석이 얹힌 채의 높이가 초헌 보다 훨씬 낮은 위치에 있습니다. 초헌에서는 두 개의 채를 연결한 막대를 어깨에 메었는데, 평교자에서는 그 막대에 끈을 달고, 그 끈을 어깨에 메어 좌석의 높이가 훨씬 낮아 안정적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매우 관심이 있는 것은 행차 모습이 아니라 민가의 모습입니다. <좌의정시>는 다른 그림처럼 벼슬에 올라 부임하는 행차를 묘사한 그림이 아닙니다. 이 그림은 좌의정이 공무를 마치고 귀가하는, 즉 정승의 퇴근하는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그것은 주위에 축하해 주러 나온 백성들이 없고, 행차 시에 반드시 뒤따르는 악대도 없다는 것에서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주인공이 막 지나가려고 하는 집은 일반 여염집과는 차이가 납니다. 왜냐하면 등(燈)이 장대에 매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 집은 바로 주막집이고 등은 홍등(紅燈), 또는 주등(酒燈)입니다. 조선시대에 주막집에는 이렇게 보통 주등을 막대기에 걸어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고급 주막은 처마 밑에 화려한 등을 달았습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좌의정이 퇴근길에 이 주막집에 들르느냐 마느냐를 고민하는 장면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집은 그렇게 고급스러운 집 같지는 않고, 주모도 나와 있지 않고, 단골 집은 이곳에서 멀고,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갈 수밖에 없는 고민하는 좌의정의 모습입니다.
또 다른 <평생도 화첩>으로 김홍도가 그렸다고 전해지는 그림에서는 이 장면을 좀 더 흥미롭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傳 김홍도 <평생도 화첩> 중 삼태복구(三台卜甌). 개인 소장
이 <평생도 화첩>에서는 주모가 문 앞까지 나와서 보다 적극적으로 이 잠재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습니다. 좌의정을 비롯한 일행 중 누구도 주모에게 눈 길을 주지 않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혹은 이미 주막에서 시간을 보내고 주모의 배웅을 받으며 나오는 장면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마도 피곤한 공무를 끝내고 귀가하기 전에 잠시 술로 목을 축이는 이러한 풍경이 당시 일반적인 관료들의 일상적인 모습이었을 것이고, 이는 지금의 퇴근 후 회식 문화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이렇게 <평생도>는 근엄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면을 가지고 있기에 민화의 소재로 널리 쓰이는 것 같습니다.
傳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중 좌의정시. 중앙박물관
9. 회혼식(回婚式) - 혼인 60주년 기념 잔치
<회혼식>
회혼식은 해로한 부부의 결혼 60주년을 기념하는 축하잔치입니다. 노부부가 혼례복을 입고 의식을 재현하여 일가친척과 하객들에게 축하를 받고 있습니다. 보통 회혼식에서는 사위가 중방(中房)이 되어 시중드는 사람의 역할을 하고, 아들은 집사(執事), 며느리와 딸들이 수모(手母)가 되어 이 날의 신부인 노부인의 단장을 도와주게 됩니다.
자손들은 고운 색옷을 갖춘 채 부모 앞에서 춤을 추거나 어리광을 부리면서 흥을 돋우고 친지들은 축하 시를 지어 받치며, 주인공처럼 벼슬한 사람이 회혼례를 맞이하면 임금이 의복, 잔치 음식과 궤장( 70세 이상의 연로한 공신에게 하사한 앉을 것과 지팡이)을 하사했습니다.
모당 홍이상 선생은 21세 되던 해인 1569년에 혼례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그와 혼인한 정경부인 안동 김씨는 1554년 출생하여 1616년에 명을 달리했으니 이 부부는 60년을 미처 채우지 못하고 47년간 해로한 셈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평생도>는 반드시 현실과 일치할 필요는 없고, 부부가 60년 동안 별 탈 없이 해로하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회혼식>을 감상하였을 것입니다.
<모당 홍이상 평생도>는 여덟 번 째인 아래 그림으로 끝납니다. 이 그림의 위쪽에 "辛丑九月士能畫于瓦暑直中"이라는 글이 있는데, 여기서 사능(士能)은 김홍도의 호입니다. 그리고 신축년(辛丑年)은 1781년이고 이해 9월에 김홍도가 와서(瓦署)에 근무하면서 그렸다고 한 것입니다. 이 문구로 인해 이 평생도가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이 그린 후 이 글을 써 놓은 것으로 추정합니다.
傳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중 회혼식. 중앙박물관
10. 회방례(回榜禮) - 과거 급제 60주년 축하 잔치
<회방례>
혼인 이후 60년이 되면 회혼례를 갖듯이, 과거 급제 후 60년이 되면 축하잔치로 회방례를 베풀었습니다. 오늘날의 정년퇴임식과 유사합니다.
초헌을 타고 행차하는 모습은 전반적으로 <병조판사시>의 모습과 유사합니다. 단지 주인공이 탄 초헌 앞에는 어사화를 꽂은 젊은이가 평교자를 타고 있고, 초헌 뒤에는 백마를 탄 젊은이가 뒤따르고 있어 주인공이 거쳐온 벼슬의 과정을 파노라마 처럼 한 장면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입니다. 또한 행렬 앞에는 악대와 춤꾼들이 이 날의 축제 분위기를 한껏 높이고 있습니다.
원래 이 장면은 <모당 홍이상 평생도>에는 없는 장면이고, 홍이상 선생도 31세 때인 1579년 장원 급제 후 60년이 되기 전에 사망하여 회방례는 치르지 못하였습니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이후 10폭이나 12폭의 병풍이 유행하던 시기에 원본을 모방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대부분의 8폭 평생도에서는 <회혼식>이 제일 마지막에 장황되어 첫 그림인 <돌잔치>와 함께 평생의례의 앞뒤를 이루어 짝을 맞춥니다. 그리고 <돌잔치 다음에 <혼인식>과 마지막 그림 중간에 관직생활이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10폭, 12폭의 평생도에서는 중간에 서당에서 공부하는 모습 등 인상적인 장면을 추가하고, <회혼식> 다음에 <회방례> 장면이나 퇴직 후 산림에 은거하는 등 편안한 노후를 보내는 장면이 추가되기도 합니다.
이상에서 <모당 홍이상 평생도>를 기본으로 하는 <평생도> 10폭 병풍의 내용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돌잔치>, <혼례식>, <응방도>, <한림겸수찬>, <송도유수>, <병조판서>, <좌의정>, <회혼례> 등으로 이루어진 <모당 홍이상 평생도> 병풍의 구성 내용과 도상은 현재 남아 있는 대부분의 평생도의 바탕이 될 만큼 평생도의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이 평생도는 실제로 주인공이 보낸 일생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가상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실존 인물의 일대기라 전하는 작품들 또한 실존 인물의 생애를 그대로 그린 것이 아니라 사대부들이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태어나서 무사히 돌을 지나 건강히 자라다가 배우자를 잘 만나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벼슬살이하는 것이 이 평생도의 주제이며 모든 이들이 바라 마지않는 사람들의 일생이었습니다. 곧 건강과 화목, 출세, 그리고 장수 등 모든 사람들의 염원을 이 평생도가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傳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8폭 병풍. 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