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성묘배전도. 옻 종이에 분채. 152 x 63.5cm
<화성능행도>에서 가장 첫번째 행사를 묘사한 이 그림은 화성의 향교 대성전에서 참배한 <화성성묘전배도>입니다. 이 날은 1795년 윤 2월11일로 행차 셋째 날이지만, 화성에서 공식행사가 처음 시작되는 첫째 날이기도 합니다.
정조가 화성에 있는 향교의 대성전에 참배하는 것인데, 첫 행사를 향교참배로 정한 것은 학문을 사랑하는 정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수원향교로 되어 있는 당시의 화성향교 대성전. 원래 고려시대 화성시에 세워졌으나 정조 13년(1789년)에 수원 성곽을 축성하면서 수원시 팔달구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 지었습니다.
그림에서 맨 위 건물이 대성전이고, 그 아래 건물이 강당인 명륜당입니다. 대성전은 성묘(聖廟), 혹은 문묘(文廟)라고도 하며, 공자에서 주희에 이르는 21명의 중국 성현과, 설총에서 박세채에 이르는 15명의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수원향교 명륜당. 명륜당 좌우에 있는 건물이 서재와 동재로서 기숙사 역할을 하였던 곳입니다.
화성 향교는 팔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림에서도 화면 전체적으로 팔달산 자락에 빙 둘러싸인 가운데 장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대성전 앞 뜰에는 청금복을 입은 유생들이, 그 아래 명륜당 뒤로는 수행한 문무백관들이 각각 위치하고 있고, 명륜당 앞 뜰과 향교의 주위에는 많은 병사들이 호위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마을에서 구경 나온 사람들의 자유로운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일반 민중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단원 김홍도 풍의 그림을 이어 받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세부도
그림 아랫 부분 세부도를 보면 아이들은 뛰어 놀고 부녀자들은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으며, 혹은 아이를 업고 온 아낙도 보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물건(아마도 엿장수인 듯합니다)을 파는 아이도 보입니다. 한편의 풍속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따라 이 날 정조가 참배를 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조는 향교 문 밖에서 말에 내려 뚜껑이 없는 가마(즉 여輿)를 타고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옷을 면복으로 갈아입고 동쪽 협문으로 들어가 동쪽 계단을 타고 올라가 대성전 앞 기둥에 서서 서쪽을 향해 선 다음 네 번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종한 백관과 유생들도 규정에 따라 예를 올렸습니다.
이후 정조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가 모셔진 묘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펴보았습니다.
정조는 문묘가 낡고 단청이 헌 것을 지적하며 수리를 지시하였고, 다시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유생들에게 오늘 있을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승지가 이 날 뜰에 들어온 유생은 모두 36명인데 응시를 못하였다고 하자, 왕은 이들에게 모두 응시 기회를 줄 것을 명하였고, 과거 답안 봉투 안에 "성묘집사유생(聖廟執事儒生"이라고 쓰라 지시를 내립니다. 이렇게 정조의 문묘 참배에 참석한 유생들에게 특별히 과거 응시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식까지 하라는 특혜를 내린 것입니다.
왕은 명륜당으로 내려와 군복으로 갈아입고 향교 문을 나와 말을 타고 다시 행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808명입니다.
리움박물관 소장 <화성성묘배전도)
화성성묘배전도. 옻 종이에 분채. 152 x 63.5cm
<화성능행도>에서 가장 첫번째 행사를 묘사한 이 그림은 화성의 향교 대성전에서 참배한 <화성성묘전배도>입니다. 이 날은 1795년 윤 2월11일로 행차 셋째 날이지만, 화성에서 공식행사가 처음 시작되는 첫째 날이기도 합니다.
정조가 화성에 있는 향교의 대성전에 참배하는 것인데, 첫 행사를 향교참배로 정한 것은 학문을 사랑하는 정조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재는 수원향교로 되어 있는 당시의 화성향교 대성전. 원래 고려시대 화성시에 세워졌으나 정조 13년(1789년)에 수원 성곽을 축성하면서 수원시 팔달구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겨 지었습니다.
그림에서 맨 위 건물이 대성전이고, 그 아래 건물이 강당인 명륜당입니다. 대성전은 성묘(聖廟), 혹은 문묘(文廟)라고도 하며, 공자에서 주희에 이르는 21명의 중국 성현과, 설총에서 박세채에 이르는 15명의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수원향교 명륜당. 명륜당 좌우에 있는 건물이 서재와 동재로서 기숙사 역할을 하였던 곳입니다.
화성 향교는 팔달산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림에서도 화면 전체적으로 팔달산 자락에 빙 둘러싸인 가운데 장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대성전 앞 뜰에는 청금복을 입은 유생들이, 그 아래 명륜당 뒤로는 수행한 문무백관들이 각각 위치하고 있고, 명륜당 앞 뜰과 향교의 주위에는 많은 병사들이 호위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마을에서 구경 나온 사람들의 자유로운 모습도 보입니다. 이렇게 일반 민중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은 단원 김홍도 풍의 그림을 이어 받은 화가들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세부도
그림 아랫 부분 세부도를 보면 아이들은 뛰어 놀고 부녀자들은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으며, 혹은 아이를 업고 온 아낙도 보입니다. 또 한편에서는 물건(아마도 엿장수인 듯합니다)을 파는 아이도 보입니다. 한편의 풍속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에 따라 이 날 정조가 참배를 한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정조는 향교 문 밖에서 말에 내려 뚜껑이 없는 가마(즉 여輿)를 타고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옷을 면복으로 갈아입고 동쪽 협문으로 들어가 동쪽 계단을 타고 올라가 대성전 앞 기둥에 서서 서쪽을 향해 선 다음 네 번 절하였습니다. 그리고 배종한 백관과 유생들도 규정에 따라 예를 올렸습니다.
이후 정조는 공자를 비롯한 성현의 위패가 모셔진 묘 안으로 들어가 내부를 살펴보았습니다.
정조는 문묘가 낡고 단청이 헌 것을 지적하며 수리를 지시하였고, 다시 동쪽 계단으로 내려와 유생들에게 오늘 있을 과거시험에 응시하였는지를 물었습니다. 승지가 이 날 뜰에 들어온 유생은 모두 36명인데 응시를 못하였다고 하자, 왕은 이들에게 모두 응시 기회를 줄 것을 명하였고, 과거 답안 봉투 안에 "성묘집사유생(聖廟執事儒生"이라고 쓰라 지시를 내립니다. 이렇게 정조의 문묘 참배에 참석한 유생들에게 특별히 과거 응시할 수 있고, 또한 그들을 알아볼 수 있는 표식까지 하라는 특혜를 내린 것입니다.
왕은 명륜당으로 내려와 군복으로 갈아입고 향교 문을 나와 말을 타고 다시 행궁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808명입니다.
리움박물관 소장 <화성성묘배전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