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남헌방방도. 옻 종이에 분채 152x63.5cm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는 행차의 셋째 날인 윤 2월 11일 오전에 과거시험을 실시한 뒤 같은 날 오후 그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입니다.
정조는 이 날 아침 일찍(정확하게는 묘시로 5~7시 사이) 향교에서 문묘 참배를 마치고 바로(진시 : 아침 7~9시) 행궁의 오른 편에 있는 낙남헌에서 시행된 문무과 별시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날의 과거시험은 화성부 및 그 인근 지역인 광주, 과천, 시흥 지역의 선비들과 무사들을 등용하여 지역주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정조가 융복을 입고 낙남헌에 나타나자 음악이 연주되었다가 자리에 오르자 음악이 중지되었습니다. 시험에 앞서 일정한 의식이 치러졌는데, 참가자들이 모두 절을 네 번씩 하고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면 절을 할 때마다 음악이 연주되고 일어나면 음악이 중지됩니다.
낙남헌 안에는 정조의 어좌(실제로는 정조가 앉아 있었지만 그림에서는 왕의 어좌만 표현합니다)와 배석한 입시 관원들의 모습이 보이고, 섬돌 아래에는 홍패(합격증), 어사화 등이 놓인 탁자가 보입니다
정조는 의식이 끝난 뒤 시험문제를 직접 정해주었는데, 제목은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였습니다. 어머니인 혜경궁이 오래 사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의 부(賦)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무과를 치르기 위해 응시생을 하나씩 불러 활을 쏘게 하였습니다. 무과에는 모두 137명이 응시하였습니다.
이 날의 과거 급제자는 문과 5명, 무과 56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림에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과 5명 중에는 앞의 <화성성묘배전도>에서 언급한 지역 유생들, 곧 정조가 특별히 과거 응시 자격을 준 사람들이 실제로 합격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화성에서 2명, 광주, 시흥, 과천에서 각각 1명씩 합격하여 이 중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무과 합격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의식이 방방의(放榜儀)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의 정확한 명칭은 낙남헌에서 과거시험 합격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오후 2시에 해당하는 미정(未正)에 융복을 입은 왕이 친히 나와 합격자에게 홍패와 기타 예물을 하사하였고, 최우수 상인 갑과 합격자에게는 특별히 우산처럼 생긴 깃발인 개(蓋)를 주었습니다.
<낙남헌방방도>에는 총 841명의 인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김홍도 <화성행궁도>. 판본 채색. 개인 소장
과거시험장인 낙남헌은 원래 정조가 화성 행차 시 활을 쏘던 활터였는데, 정조 13년(1789)에 이곳에 정자를 세웠으니, 곧 득중정(得中亭)이라는 건물(이를 사정(射亭)이라고 합니다)입니다. 김홍도의 <화성행궁도>를 보면 맨 위의 건물 우측에 낙남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조 18년(1794)에 득중정을 위쪽(여기서 위쪽은 곧 서쪽입니다.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의 뒤쪽에 해당합니다)으로 옮기고 그 터를 넓게 닦아서 낙남헌(洛南軒)을 새로 지었습니다. 낙남헌은 정조가 신하들을 접견하고, 각종 행사를 치르던 행궁의 별당(別堂)입니다. 봉수당이 바로 그 옆에 있고, 서쪽으로 이어진 행랑을 통해 득중정으로 연결되게 하였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행궁 전도> 부분도. 화성성역의궤 中
위의 그림을 보면 낙남헌 바로 앞에는 담장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낙남헌은 넓은 마당을 두고 북쪽을 향해 있는데, 건물 앞쪽 부분의 담장은 홍살판으로 만들어,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치워버리고 마당을 넓혀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곳 낙남헌에서는 수원의 노인들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화성 건축에 참가한 기술자와 공사 때문에 고생한 지역 주민들을 위해 축하공연을 여는 등 지역민들과 함께 한 공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곳을 드나들 때 위압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정조의 배려가 돋보이는 장소입니다.
낙남헌 실경.
낙남헌은 일제시기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리움박물관의 <낙남헌방방도>
낙남헌방방도. 옻 종이에 분채 152x63.5cm
<낙남헌방방도(洛南軒放榜圖)>는 행차의 셋째 날인 윤 2월 11일 오전에 과거시험을 실시한 뒤 같은 날 오후 그 합격자를 발표하고 시상하는 장면입니다.
정조는 이 날 아침 일찍(정확하게는 묘시로 5~7시 사이) 향교에서 문묘 참배를 마치고 바로(진시 : 아침 7~9시) 행궁의 오른 편에 있는 낙남헌에서 시행된 문무과 별시에 참여하였습니다.
이 날의 과거시험은 화성부 및 그 인근 지역인 광주, 과천, 시흥 지역의 선비들과 무사들을 등용하여 지역주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정조가 융복을 입고 낙남헌에 나타나자 음악이 연주되었다가 자리에 오르자 음악이 중지되었습니다. 시험에 앞서 일정한 의식이 치러졌는데, 참가자들이 모두 절을 네 번씩 하고 정해진 위치로 돌아가면 절을 할 때마다 음악이 연주되고 일어나면 음악이 중지됩니다.
낙남헌 안에는 정조의 어좌(실제로는 정조가 앉아 있었지만 그림에서는 왕의 어좌만 표현합니다)와 배석한 입시 관원들의 모습이 보이고, 섬돌 아래에는 홍패(합격증), 어사화 등이 놓인 탁자가 보입니다
정조는 의식이 끝난 뒤 시험문제를 직접 정해주었는데, 제목은 "근상천천세수부(謹上千千歲壽賦)"였습니다. 어머니인 혜경궁이 오래 사시기를 기원하는 내용의 부(賦)를 지으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무과를 치르기 위해 응시생을 하나씩 불러 활을 쏘게 하였습니다. 무과에는 모두 137명이 응시하였습니다.
이 날의 과거 급제자는 문과 5명, 무과 56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림에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문과 5명 중에는 앞의 <화성성묘배전도>에서 언급한 지역 유생들, 곧 정조가 특별히 과거 응시 자격을 준 사람들이 실제로 합격하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화성에서 2명, 광주, 시흥, 과천에서 각각 1명씩 합격하여 이 중에 포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무과 합격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의식이 방방의(放榜儀)입니다. 따라서 이 그림의 정확한 명칭은 낙남헌에서 과거시험 합격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것입니다. 오후 2시에 해당하는 미정(未正)에 융복을 입은 왕이 친히 나와 합격자에게 홍패와 기타 예물을 하사하였고, 최우수 상인 갑과 합격자에게는 특별히 우산처럼 생긴 깃발인 개(蓋)를 주었습니다.
<낙남헌방방도>에는 총 841명의 인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김홍도 <화성행궁도>. 판본 채색. 개인 소장
과거시험장인 낙남헌은 원래 정조가 화성 행차 시 활을 쏘던 활터였는데, 정조 13년(1789)에 이곳에 정자를 세웠으니, 곧 득중정(得中亭)이라는 건물(이를 사정(射亭)이라고 합니다)입니다. 김홍도의 <화성행궁도>를 보면 맨 위의 건물 우측에 낙남헌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조 18년(1794)에 득중정을 위쪽(여기서 위쪽은 곧 서쪽입니다. 노래당(老來堂)이라는 건물의 뒤쪽에 해당합니다)으로 옮기고 그 터를 넓게 닦아서 낙남헌(洛南軒)을 새로 지었습니다. 낙남헌은 정조가 신하들을 접견하고, 각종 행사를 치르던 행궁의 별당(別堂)입니다. 봉수당이 바로 그 옆에 있고, 서쪽으로 이어진 행랑을 통해 득중정으로 연결되게 하였습니다. 아래 그림을 보면 더욱 자세히 알 수 있습니다.
<행궁 전도> 부분도. 화성성역의궤 中
위의 그림을 보면 낙남헌 바로 앞에는 담장이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낙남헌은 넓은 마당을 두고 북쪽을 향해 있는데, 건물 앞쪽 부분의 담장은 홍살판으로 만들어, 행사가 있을 때에는 그것을 치워버리고 마당을 넓혀 많은 인원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이곳 낙남헌에서는 수원의 노인들을 초대해 잔치를 베풀어 주었고, 화성 건축에 참가한 기술자와 공사 때문에 고생한 지역 주민들을 위해 축하공연을 여는 등 지역민들과 함께 한 공간이기 때문에 누구나 이곳을 드나들 때 위압감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한 정조의 배려가 돋보이는 장소입니다.
낙남헌 실경.
낙남헌은 일제시기 화성행궁이 철거될 당시 훼손당하지 않고 오늘날까지 남아 있습니다.
리움박물관의 <낙남헌방방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