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주교환어도>. 옻 종이에 분채. 152x63.5cm
화성 행차 여덟째 날, 드디어 마지막 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 있고, 가장 극적인 장면이며, 조선시대 최대의 이벤트였던 행사를 표현한 장면입니다.
화성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강을 배다리로 건너 한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용산 쪽에서 바라보며 묘사하였는데, 배다리는 이 행사를 위해 임시로 배를 잇대어 다리를 만든 것입니다.
윤 2월 16일 아침 6시 45분경(묘정 삼각 卯正三刻)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에 올라 시흥행궁을 출발하였습니다. 행렬이 문성동(文星洞, 금천구 독산 본동에 위치)에 이르자 시흥 현령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길 옆에서 어가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실 정조는 시흥행궁을 출발하기 전에 미리 교를 내려 지방관에게 경내의 부로(父老)와 민인(民人)을 데리고 연로에 나와 대기하고 있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른바 길가에서의 격쟁(擊錚)을 시행하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집집마다 부과되는 부역(즉 호역戶役)의 폐단을 시정하고, 또 갑자기 왕에게로 다가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몇 말의 쌀도 주었습니다.
문성동에서의 휴식을 마치고 행차는 번대방평(蕃大坊坪, 지금의 동작구 대방동), 만안현(萬安縣, 지금의 상도동 고개)을 거쳐 노량행궁에 도착하였습니다.
왕은 혜경궁을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 지금의 동작구 본동 10-30번지)으로 맞아들이고 점심을 올렸습니다.
노량행궁 세부도. 위의 정자가 용양봉저정
노량행궁은 1791년 노량나루(노량진) 건너편 언덕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곳에 지은 정문과 건물 2~3칸, 그리고 정자 한 채의 작은 행궁이었습니다. 지금은 정면 6칸, 측면 2칸, 50평 규모의 건물한 채만 남았는데 이것이 용양봉저정이라는 정자입니다. 정조는 이 정자의 이름 용양봉저를 '용이 뛰어놀고 봉황새가 하늘 높이 난다는 뜻'으로 임금 행차의 위엄이 성대함을 나타내도록 지었습니다.
용양봉저정 실경
정조가 현륭원으로 거둥할 때마다 이곳의 한강을 건넜는데, 배다리를 설치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잠시 어가를 머물러 쉬게 하려고 이곳에 정자를 지었고, 여기서 쉬면서 점심을 먹었으므로 이곳을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쉬면서 배다리를 관리한 주교도청(舟橋都廳) 이홍운을 불러 금단 1필을 하사하고, 배다리를 건설한 뱃사공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습니다.
또한 배다리 건설의 총책임자인 주교당상(舟橋堂上) 서용보를 불러 노고를 치하하고, 배들을 지금 내려보내면 다시 조운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한강을 건너면 다음날 다리를 철파하고 배들을 내려보낼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왕의 지시대로 배다리는 다음날, 즉 윤 2월 17일 해체되었으니 다리를 놓은 지 23일 만이었습니다.
정조는 다시 말을 타고 드디어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한양을 입성하였습니다.
배다리를 건너는 혜경궁의 가마 세부도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왕이 탄 말이 혜경궁의 뒤를 따르고 있는 세부도. 왕은 표현하지 않음
배다리의 역사는 짧지 않습니다.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하는데, <시경(詩經)> 대아(大雅) 편의 <대명(大明)>에 있는 시를 보면 문왕이 위수 가에서 배로 다리를 만들어 신부를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것이 최초의 배다리에 대한 기록입니다. 대략 기원전 1천여 년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에 최초의 배다리 기록이 보이는데, 고려 정종(재위 923~949) 시기에 임진강에 부교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 17년인 1417년입니다. 태종은 지금의 송파구 삼전도인 마전포(麻田浦)에 건설된 주량(舟梁 : 이때까지도 배다리는 주량으로 불렸습니다)이 견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책임자를 파직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한강, 임진강, 압록강 등에 배다리를 설치한 사례가 나타납니다.
정조가 배다리를 처음 설치한 것은 정조 13년(1789년) 10월입니다. 이때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현륭원으로 옮겼는데,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배다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그 해 12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용양봉저정 아래의 한강변에 주교사(舟橋司)라는 관청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정조는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이라는 책자를 작성하여 배다리에 대한 제도를 규격화하였습니다. 1793년 1월, 주교사에서는 <주교지남>을 수정한 <주교절목(舟橋節目)>을 작성해 올림으로써 주교의 제도는 완비되었습니다.
이 <주교지남>과 <주교절목>에 따라 주교를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배는 한강을 운항하는 경강선 80척을 이용했습니다. 36척으로는 주교를 만들고, 나머지는 주교의 좌우에 세워 다리를 끈으로 묶거나 호위하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80척의 배 중 36척은 다리로 이용하고 나머지는 이렇게 선창 좌우에 배치하였습니다. 홍살문은 이곳과 반대편, 그리고 중앙에 모두 3개를 설치하였습니다. 배에 닻을 내린 것이 보이고, 이 닻을 내린 상태에서 두 배를 나무로 이어가며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중앙에 위치한 배의 높이가 가장 높고 양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져, 멀리서 보면 무지개 모양처럼 만들었습니다.
배가 연결되면 위에 판자를 덮고 그 위에는 잔디를 깔았습니다. 배가 소집되면 이들은 양화진이나 서강 쪽에서 잔디를 거두면서 집결하였습니다. 도로가 완성되면 판자의 양쪽 끝에는 난간을 설치했습니다.
강의 양안에는 선창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선창 만으로 다리를 만드는 방법과 주교를 놓는 방법을 놓고 매우 많은 고민을 하였는데, 결국은 비용과 안정성의 문제였습니다. 주교가 비용은 더 많이 들었지만 안정성이 높아 주교로 결정된 것입니다.
선창이 글씨 써놓은 부분입니다. 선창다리는 주교와 연결하는 나무에 구멍을 뚫어 빗장을 지르는 방법을 써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이를 그림에서는 배와 꺾어지게 이어진 방법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선창은 강에서 잡석을 채취하여 쌓고 석회로 그 틈을 메웠습니다. 선창과 주교 사이는 선창다리를 만들어 연결했는데, 선창다리는 강물의 고저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교와 연결하는 나무에 구멍을 뚫고 빗장을 지르는 방법을 썼습니다.
각 배에는 12명의 군사(이들은 격군格軍이라 함)가 있어 80척에 모두 약 1천 명의 군사가 배치되었습니다.
이렇게 정조가 주교 제도를 정비하고 필요물품를 규격화함으로써 경비나 인력이 크게 절감되었고, 이제 배다리를 통해 국왕의 능행에 참여하는 수천 명의 인원과 말, 수많은 물자가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한강주교환어도>에는 군사 등 행사인원 696명과 구경하는 일반 백성들 267명 등 모두 963명이 등장합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의 주교도
<화성능행도>는 본래 진찬연을 비롯한 궁중행사를 기록한 병풍입니다. 그러나 <한강주교환어도>는 다른 폭들과는 달리 궁중 행사가 아닌 주교 자체를 주제로 하였습니다. 즉 주교는 단순히 교통수단이 아니라 이 병풍의 독립적인 주제가 되었는데, 이는 위에서 본 것처럼 정조가 주교 제도의 확립을 위해 취했던 여러 조치들로 인한 것입니다. 심지어 정조는 <주교지남>의 지침을 내린 이듬해인 1791년 주교의 체제를 그림으로 그려 앞으로의 전범을 삼아 참고하라는 전교까지 내렸습니다. 이 그림은 전해지지는 않지만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실린 주교도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병풍의 그림은 어가 행렬이 주교 위를 건너는 모습을 표현한 것과는 달리 의궤의 주교도는 배다리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즉 의궤의 주교도라는 설계도에 의해 제작, 설치된 주교에 따라 한강을 건너고, 그 모습을 병풍에 독립적인 화면으로 남겨놓은 것입니다.
리움 박물관 소장 <한강주교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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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화성능행도> 8폭 병풍을 따라 정조의 화성 행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병풍의 첫 장면이 화성 향교 문묘에 참배하는 그림으로 되어 있어 한양 궁궐에서 화성에 도착하기까지의 일정은 작성하지 않았지만, 화성에서 나와 궁궐로 돌아가는 노정과 같기 때문에 중복될 것 같아 일부러 제외하였습니다.
이 <화성능행도>는 단순히 궁중 행사를 묘사한 것에 더하여 원행의 의의를 후세에 증명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정조의 특별 하교가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당시 행차를 “의(義)로써 처음으로 일으킨 일이고 예(禮)는 정리(情理)를 따른 것이므로 마땅히 참고할 만한 서책을 만들어 후인에게 보여야 한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화원들 역시 그러한 국왕의 생각을 그림 작업에서 구현하여 사실적인 행차도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위에서 본 행사도들은 단일 행사를 기록한 그림으로서도 유례가 없습니다. 이들 그림들은 당당한 군사적 대오를 갖춘 가운데 어머니를 모시고 행차하며, 극진하게 진찬례를 행하는 국왕의 모습을 시각화함으로써 효(孝)의 이미지와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동시에 상징하는 기록화로 자리 잡게 됩니다. 정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대로 “행행(行幸)이 백성들에게 고통스러운 노역(勞役)의 현장이 아니라 임금의 은택이 베풀어져 행운(幸運)을 주는” 행행도(行幸圖)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역사, 행렬도의 역사까지 새로 쓰게 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의리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 핍박받던 정조가 백성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당당한 군주로 드러나는 것을 만천하에 보인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고, 역사적인 그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강주교환어도>. 옻 종이에 분채. 152x63.5cm
화성 행차 여덟째 날, 드디어 마지막 날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가장 흥미 있고, 가장 극적인 장면이며, 조선시대 최대의 이벤트였던 행사를 표현한 장면입니다.
화성에서의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한강을 배다리로 건너 한양으로 돌아오는 장면을 용산 쪽에서 바라보며 묘사하였는데, 배다리는 이 행사를 위해 임시로 배를 잇대어 다리를 만든 것입니다.
윤 2월 16일 아침 6시 45분경(묘정 삼각 卯正三刻) 정조는 군복을 입고 말에 올라 시흥행궁을 출발하였습니다. 행렬이 문성동(文星洞, 금천구 독산 본동에 위치)에 이르자 시흥 현령이 마을 사람들을 데리고 길 옆에서 어가를 맞이하였습니다.
사실 정조는 시흥행궁을 출발하기 전에 미리 교를 내려 지방관에게 경내의 부로(父老)와 민인(民人)을 데리고 연로에 나와 대기하고 있을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이른바 길가에서의 격쟁(擊錚)을 시행하라는 뜻입니다.
이곳에서 집집마다 부과되는 부역(즉 호역戶役)의 폐단을 시정하고, 또 갑자기 왕에게로 다가와 먹을 것을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는 몇 말의 쌀도 주었습니다.
문성동에서의 휴식을 마치고 행차는 번대방평(蕃大坊坪, 지금의 동작구 대방동), 만안현(萬安縣, 지금의 상도동 고개)을 거쳐 노량행궁에 도착하였습니다.
왕은 혜경궁을 용양봉저정(龍驤鳳翥亭 , 지금의 동작구 본동 10-30번지)으로 맞아들이고 점심을 올렸습니다.
노량행궁 세부도. 위의 정자가 용양봉저정
노량행궁은 1791년 노량나루(노량진) 건너편 언덕에서 한강을 내려다보는 전망 좋은 곳에 지은 정문과 건물 2~3칸, 그리고 정자 한 채의 작은 행궁이었습니다. 지금은 정면 6칸, 측면 2칸, 50평 규모의 건물한 채만 남았는데 이것이 용양봉저정이라는 정자입니다. 정조는 이 정자의 이름 용양봉저를 '용이 뛰어놀고 봉황새가 하늘 높이 난다는 뜻'으로 임금 행차의 위엄이 성대함을 나타내도록 지었습니다.
용양봉저정 실경
정조가 현륭원으로 거둥할 때마다 이곳의 한강을 건넜는데, 배다리를 설치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에 잠시 어가를 머물러 쉬게 하려고 이곳에 정자를 지었고, 여기서 쉬면서 점심을 먹었으므로 이곳을 주정소(晝停所)라고도 하였습니다.
정조는 이곳에서 쉬면서 배다리를 관리한 주교도청(舟橋都廳) 이홍운을 불러 금단 1필을 하사하고, 배다리를 건설한 뱃사공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습니다.
또한 배다리 건설의 총책임자인 주교당상(舟橋堂上) 서용보를 불러 노고를 치하하고, 배들을 지금 내려보내면 다시 조운할 수 있는가를 물으며 한강을 건너면 다음날 다리를 철파하고 배들을 내려보낼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왕의 지시대로 배다리는 다음날, 즉 윤 2월 17일 해체되었으니 다리를 놓은 지 23일 만이었습니다.
정조는 다시 말을 타고 드디어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한양을 입성하였습니다.
배다리를 건너는 혜경궁의 가마 세부도
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왕이 탄 말이 혜경궁의 뒤를 따르고 있는 세부도. 왕은 표현하지 않음
배다리의 역사는 짧지 않습니다. 중국 주나라 문왕(文王)에서 시작된 것으로 전하는데, <시경(詩經)> 대아(大雅) 편의 <대명(大明)>에 있는 시를 보면 문왕이 위수 가에서 배로 다리를 만들어 신부를 맞이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것이 최초의 배다리에 대한 기록입니다. 대략 기원전 1천여 년의 일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에 최초의 배다리 기록이 보이는데, 고려 정종(재위 923~949) 시기에 임진강에 부교를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입니다.
한강에 배다리를 설치한 최초의 기록은 태종 17년인 1417년입니다. 태종은 지금의 송파구 삼전도인 마전포(麻田浦)에 건설된 주량(舟梁 : 이때까지도 배다리는 주량으로 불렸습니다)이 견실하지 못하다는 이유로 책임자를 파직시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조선시대에는 한강, 임진강, 압록강 등에 배다리를 설치한 사례가 나타납니다.
정조가 배다리를 처음 설치한 것은 정조 13년(1789년) 10월입니다. 이때 정조는 사도세자의 묘를 양주에서 현륭원으로 옮겼는데, 상여가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를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배다리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그 해 12월 바로 위에서 언급한 용양봉저정 아래의 한강변에 주교사(舟橋司)라는 관청을 설치합니다
그리고 다음 해 정조는 직접 <주교지남(舟橋指南)>이라는 책자를 작성하여 배다리에 대한 제도를 규격화하였습니다. 1793년 1월, 주교사에서는 <주교지남>을 수정한 <주교절목(舟橋節目)>을 작성해 올림으로써 주교의 제도는 완비되었습니다.
이 <주교지남>과 <주교절목>에 따라 주교를 간단하게 알아보겠습니다.
우선, 배는 한강을 운항하는 경강선 80척을 이용했습니다. 36척으로는 주교를 만들고, 나머지는 주교의 좌우에 세워 다리를 끈으로 묶거나 호위하는 용도로 사용했습니다.
80척의 배 중 36척은 다리로 이용하고 나머지는 이렇게 선창 좌우에 배치하였습니다. 홍살문은 이곳과 반대편, 그리고 중앙에 모두 3개를 설치하였습니다. 배에 닻을 내린 것이 보이고, 이 닻을 내린 상태에서 두 배를 나무로 이어가며 다리를 만들었습니다.
또한 중앙에 위치한 배의 높이가 가장 높고 양쪽으로 갈수록 점차 낮아져, 멀리서 보면 무지개 모양처럼 만들었습니다.
배가 연결되면 위에 판자를 덮고 그 위에는 잔디를 깔았습니다. 배가 소집되면 이들은 양화진이나 서강 쪽에서 잔디를 거두면서 집결하였습니다. 도로가 완성되면 판자의 양쪽 끝에는 난간을 설치했습니다.
강의 양안에는 선창을 만들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선창 만으로 다리를 만드는 방법과 주교를 놓는 방법을 놓고 매우 많은 고민을 하였는데, 결국은 비용과 안정성의 문제였습니다. 주교가 비용은 더 많이 들었지만 안정성이 높아 주교로 결정된 것입니다.
선창이 글씨 써놓은 부분입니다. 선창다리는 주교와 연결하는 나무에 구멍을 뚫어 빗장을 지르는 방법을 써 자유자재로 움직이게 만들었는데 이를 그림에서는 배와 꺾어지게 이어진 방법으로 표시하였습니다.
선창은 강에서 잡석을 채취하여 쌓고 석회로 그 틈을 메웠습니다. 선창과 주교 사이는 선창다리를 만들어 연결했는데, 선창다리는 강물의 고저에 따라 움직여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주교와 연결하는 나무에 구멍을 뚫고 빗장을 지르는 방법을 썼습니다.
각 배에는 12명의 군사(이들은 격군格軍이라 함)가 있어 80척에 모두 약 1천 명의 군사가 배치되었습니다.
이렇게 정조가 주교 제도를 정비하고 필요물품를 규격화함으로써 경비나 인력이 크게 절감되었고, 이제 배다리를 통해 국왕의 능행에 참여하는 수천 명의 인원과 말, 수많은 물자가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한강주교환어도>에는 군사 등 행사인원 696명과 구경하는 일반 백성들 267명 등 모두 963명이 등장합니다.
원행을묘정리의궤 중의 주교도
<화성능행도>는 본래 진찬연을 비롯한 궁중행사를 기록한 병풍입니다. 그러나 <한강주교환어도>는 다른 폭들과는 달리 궁중 행사가 아닌 주교 자체를 주제로 하였습니다. 즉 주교는 단순히 교통수단이 아니라 이 병풍의 독립적인 주제가 되었는데, 이는 위에서 본 것처럼 정조가 주교 제도의 확립을 위해 취했던 여러 조치들로 인한 것입니다. 심지어 정조는 <주교지남>의 지침을 내린 이듬해인 1791년 주교의 체제를 그림으로 그려 앞으로의 전범을 삼아 참고하라는 전교까지 내렸습니다. 이 그림은 전해지지는 않지만 <원행을묘정리의궤>에 실린 주교도와 유사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병풍의 그림은 어가 행렬이 주교 위를 건너는 모습을 표현한 것과는 달리 의궤의 주교도는 배다리의 구조를 설명하는 데 주안점을 두었습니다. 즉 의궤의 주교도라는 설계도에 의해 제작, 설치된 주교에 따라 한강을 건너고, 그 모습을 병풍에 독립적인 화면으로 남겨놓은 것입니다.
리움 박물관 소장 <한강주교환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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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에서 <화성능행도> 8폭 병풍을 따라 정조의 화성 행차를 따라가 보았습니다. 병풍의 첫 장면이 화성 향교 문묘에 참배하는 그림으로 되어 있어 한양 궁궐에서 화성에 도착하기까지의 일정은 작성하지 않았지만, 화성에서 나와 궁궐로 돌아가는 노정과 같기 때문에 중복될 것 같아 일부러 제외하였습니다.
이 <화성능행도>는 단순히 궁중 행사를 묘사한 것에 더하여 원행의 의의를 후세에 증명할 수 있도록 하라는 정조의 특별 하교가 크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정조는 당시 행차를 “의(義)로써 처음으로 일으킨 일이고 예(禮)는 정리(情理)를 따른 것이므로 마땅히 참고할 만한 서책을 만들어 후인에게 보여야 한다"라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화원들 역시 그러한 국왕의 생각을 그림 작업에서 구현하여 사실적인 행차도를 탄생시켰던 것입니다.
위에서 본 행사도들은 단일 행사를 기록한 그림으로서도 유례가 없습니다. 이들 그림들은 당당한 군사적 대오를 갖춘 가운데 어머니를 모시고 행차하며, 극진하게 진찬례를 행하는 국왕의 모습을 시각화함으로써 효(孝)의 이미지와 강력한 군주의 이미지를 동시에 상징하는 기록화로 자리 잡게 됩니다. 정조 스스로 의미를 부여한 대로 “행행(行幸)이 백성들에게 고통스러운 노역(勞役)의 현장이 아니라 임금의 은택이 베풀어져 행운(幸運)을 주는” 행행도(行幸圖)로 거듭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듯 1795년의 화성 행차는 조선시대 궁중회화의 역사, 행렬도의 역사까지 새로 쓰게 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의리죄인(사도세자)의 아들이라 핍박받던 정조가 백성과 더불어 행복을 누리는 당당한 군주로 드러나는 것을 만천하에 보인 참으로 역사적인 순간이고, 역사적인 그림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