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은 결혼을 하고 나서 얼마 안되어 과거를 치르게 됩니다.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문과와 무과, 잡과 등으로 나뉘는데, 주인공은 당연히 문과에 응시하게 되고, 그중에서도 소과를 치릅니다. 소과는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이기 때문에 생진과시(生進科試)라고도 했는데, 소과에 합격해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습니다.
이 <소과응시도>는 다른 평생도에서는 잘 볼 수 있는 그림은 아닙니다. <모당 홍이상 평생도>에도 이 그림은 빠져 있습니다. 단,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과응시도>가 몇 점 전하는데,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이 <평생도>에 추가해서 민간에 전해져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혼인 전에 먼저 소과를 보는 경우도 있어 평생도에 따라 <혼인식>과 <소과응시의> 순서가 바뀌어서 장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건물 내부에는 시험감독관이 앉아있고, 마당에는 일산(日傘)을 받친 채 삼삼오오 모여 답안을 작성하고 있는 소과 시험장의 모습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의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과거 응시자들은 몇몇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마도 팀 워크를 통한 답안지 제출 형식이 아닐까 합니다. 큰 우산(일산)으로 서로 칸막이를 하고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매우 분업화되어 있었습니다. 수만 명이 몰려들어도 이중 제대로 채점되는 인원은 극히 소수였기 때문에 서로 자리를 잡아 앉으려고 난리가 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난장(亂場)'이란 단어였고 우리가 지금 '난장판이 됐다'라고 할 때 쓰는 그 난장판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자리를 미리 잡아주는 대행 서비스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런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들을 일컬어 '선접(先接)꾼'이라 불렸습니다. 자리다툼을 하다 맞아죽거나 깔려죽는 선접꾼도 많았기 때문에 선접꾼은 보통 조선시대 목숨을 건 아르바이트로 불렸으며 명문 대갓집의 경우엔 수십~수백 명의 선접꾼을 고용해서 미리 여러 자리를 독식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시험 응시자가 점점 늘어나 18세기 이후부터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자리를 맡는 선접꾼 외에도 문제를 빨리 풀어 응시자에게 알려주는 '거벽(巨擘)', 서예 솜씨가 뛰어나 거벽이 가져온 답안을 답안지에 옮겨 쓰는 '사수(寫手)' 등 분업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돈 있는 권세가의 자손들이 이런 팀플레이로 합격하기 시작하자 일반 사람들도 아예 팀을 이루고 분업을 해서 과거를 보는 일이 횡행했습니다
이렇게 근엄한 평생도도 김홍도의 풍속도에서 보는 것처럼 과거시험의 위선과 모순을 꼬집는 풍자적인 모습으로 그렸던 데에서 매우 민화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림입니다. 위의 그림은 따라서 과거시험장에서 팀워크를 이루며 집단 토론 형식으로 시험에 응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선접꾼, 거벽, 사수 등이 단 한 명의 소과 응시자를 위한 한 팀이 되어 그야말로 난장판을 이룬 과거장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겸리 주인장의 2015년 작품인 <평생도 10곡 병풍>입니다.
이 병풍은 김홍도의 <모당 홍이상 평생도(慕堂 洪履祥平生圖)> 8폭 병풍을 원본으로 하고, 2폭의 다른 평생도 그림을 추가로 하여 10폭으로 그렸습니다.
모당 홍이상(1549-1615) 선생은 풍산 홍씨의 중시조로, 선조와 광해군 시기의 문신으로 고양시 최초의 서원이었던 문봉서원에 배향된 고양팔현(高陽八賢) 중의 한 분입니다.
홍이상 선생은 과거에 장원급제한 후 벼슬이 대사헌에 이르렀는데 특히 자손이 번창하여, 사도세자의 장인이자 정조의 외조부로 의정부 영의정을 지낸 홍봉한과 그 아우로 좌의정을 지낸 홍인한, 그리고 정조의 신임을 얻어 세도를 펼쳤던 홍국영 등이 모두 그의 직계 후손입니다. 또한 혜경궁 홍씨의 7대조이기도 합니다.
김홍도는 1781년, 당시 노론 세력가였던 풍산홍씨의 선조인 홍이상 선생의 일생을 그린 평생도를 그렸으니 그의 나이 36세 때의 일입니다.(최근에는 이 작품이 김홍도의 화풍을 따라 그리는 후배 화가가 19세기에 제작한 것으로 밝혀졌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평생도는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기념이 될만한 경사스러운 일들을 골라 그린 풍속화입니다. 주로 사대부로서 그의 생애를 대표하는 돌잔치, 혼인식, 회혼례와 같은 의례 장면과 과거 급제에서부터 최고 품계에 이르는 관직 생활을 시간 순서로 그린 그림입니다. 대개 여덟 폭의 병풍으로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열 폭이나 열두 폭의 병풍이 유행하였습니다.
따라서 겸리 주인장의 이 <평생도> 역시 조선 후기에 만들어진 열 폭짜리의 민화를 원본으로 한 것이 되겠습니다. 김홍도가 최초로 그린 <모당 홍이상 평생도>와는 많은 차이가 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물론 그림의 순서도 각 병풍마다 서로 같지 않은데, 그 이유는 예를 들어, 각 집안마다 결혼을 한 후에 과거에 급제한 선조도 있을 것이고, 반대로 과거 급제 후 결혼한 선조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요자의 요청에 따라 민화는 가변성 있게 제작되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하에서는 평생도 각 폭의 그림들을 차례로 간단하게 살펴보고자 합니다
1. 돌잔치(초도호연<初度弧筵>)
<돌잔치>
<평생도>는 대부분 돌잔치 장면부터 시작합니다. 팔작지붕의 기와집에서 잔치가 한창이고, 가족들에 둘러싸여 돌 상을 받는 주인공이 의연하게 앉아 있습니다.
김홍도의 평생도를 보면 그림에서 사람 위에 글씨를 써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표시하였는데, 그림이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제일 위에 있는 사람들이 부모이고, 주인공 주위 대청마루에는 유모와 초대받은 손님이 앉아 있습니다. 닭들이 뛰놀고 있는 마당에는 이웃 아낙들과 어린아이들이 북적입니다.
잔치의 주인공은 굴레를 쓰고 색동 소매 저고리 위에 전복을 입었으며, 소복 바지에 붉은 염낭 주머니를 찼습니다. 탄생 후 첫 생일을 맞이한 ‘돌장이’의 돌잔치, <모당 홍이상 평생도>에서는 이 장면을 [초도호연(初度弧筵)]이라 했습니다.
초도(初度)는 첫 번째라는 뜻으로 돌을 한자로 초도일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호연(弧筵)에서 연(筵)은 '대로 엮은 자리'라는 쓰이지만 연상(筵上), 혹은 연석(筵席)이라는 말에서 보듯 연회를 뜻합니다.
그러면 호(弧 : 활)는 무슨 뜻일까요? 옛날에는 아들을 낳을 경우 활을 문 왼쪽에 걸고 딸일 경우에는 수건을 문 오른쪽에 걸었습니다. 태어난 지 사흘째가 되면 비로소 남자는 업고서 활 쏘는 의식을 하고, 여자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기<禮記>에 있는 내용입니다). 즉, 그림 제목에 호(弧)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이 그림의 주인공이 남자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탄생 장면이 아닌 돌잔치가 처음에 등장하는 이유는, 당시 영유아 사망률이 높았기 때문에 첫 번째 생일인 돌이 지나야 비로소 한고비를 넘겼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돌잔치를 크게 열어 축하하면서 앞으로도 건강하게 살기를 기원했습니다.
傳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중 초도호연. 중앙박물관
2. 혼인식(婚姻式)
돌잔치 다음으로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주인공이 혼인식을 올리는 장면입니다. <혼인식>은 평생도에서 <돌잔치>와 더불어 빠짐없이 그려지던 가례입니다. 이 그림은 혼인식 중에서도 ‘전안례(奠雁禮)’를 위해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는 장면을 그린 것입니다
'전안례'는 신랑이 신부집에 가서 처음 행하는 의례인데, 초례청에서 혼인을 거행하기에 앞서 신랑이 나무 기러기(木雁)를 상위에 올려놓는 의식입니다. 원래는 산 기러기를 썼으나 번거로워 나무로 만든 기러기로 대신하였다고 하는데 `전안(奠雁)`이라고도 하여 이 의식을 '전안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겸리에 있는 목안입니다.
목안(木雁)은 그 형상 때문에 `오리`라 부르기도 하며, 머리는 제 몸과 같이 만들기도 하나 따로 만들어 몸통에 구멍을 파 끼워 사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런 장식을 하지 않고 머리와 날개 부분만을 조각하는데 더러는 색칠한 기러기도 있습니다.
그림에서 보면 신랑의 탄 말의 고삐를 쥔 사람 앞에 목안을 보자기에 싸서 들고 가는 사람이 보이는데 그가 바로 `기럭아범`입니다. 신부집에 도착하면 신랑은 '기럭아범'에게 이 목안을 받아 전안상(奠雁床)에 바치고 절을 합니다. 그러면 신부 어머니가 치마에 감춰 안으로 들여감으로써 '전안례'를 마칩니다.
혼인 의식에 기러기를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는 많은 해석이 있습니다. 우선, 기러기는 때에 맞춰 남북으로 그 절기를 놓치지 않고 다니니 여자도 혼기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뜻이 있고, 또 기러기는 날을 때나 멈출 때 일정한 질서를 따라 행렬을 이루니 혼인에도 장유유서의 순으로 추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기러기를 제 짝이 죽으면 다른 상대를 찾지 않고 따라 죽거나 평생을 혼자 사는 의리 있는 새로 여겨 이를 상징성으로 삼아 특히 여성에게도 이를 은연중에 강조한 것으로 보입니다.
傳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중 혼인식. 중앙박물관
3. 소과응시(小科應試)
<소과응시>
주인공은 결혼을 하고 나서 얼마 안되어 과거를 치르게 됩니다. 조선시대 과거는 크게 문과와 무과, 잡과 등으로 나뉘는데, 주인공은 당연히 문과에 응시하게 되고, 그중에서도 소과를 치릅니다. 소과는 생원과 진사를 뽑는 시험이기 때문에 생진과시(生進科試)라고도 했는데, 소과에 합격해야 대과에 응시할 수 있습니다.
이 <소과응시도>는 다른 평생도에서는 잘 볼 수 있는 그림은 아닙니다. <모당 홍이상 평생도>에도 이 그림은 빠져 있습니다. 단, 김홍도의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는 <소과응시도>가 몇 점 전하는데,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이 <평생도>에 추가해서 민간에 전해져온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혼인 전에 먼저 소과를 보는 경우도 있어 평생도에 따라 <혼인식>과 <소과응시의> 순서가 바뀌어서 장황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림을 보면 건물 내부에는 시험감독관이 앉아있고, 마당에는 일산(日傘)을 받친 채 삼삼오오 모여 답안을 작성하고 있는 소과 시험장의 모습이 잘 표현되었습니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장의 분위기를 알아볼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그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과거 응시자들은 몇몇 그룹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아마도 팀 워크를 통한 답안지 제출 형식이 아닐까 합니다. 큰 우산(일산)으로 서로 칸막이를 하고 열심히 토론하는 모습입니다.
사실 조선시대의 과거시험은 매우 분업화되어 있었습니다. 수만 명이 몰려들어도 이중 제대로 채점되는 인원은 극히 소수였기 때문에 서로 자리를 잡아 앉으려고 난리가 나곤 했습니다.
그래서 나온 말이 '난장(亂場)'이란 단어였고 우리가 지금 '난장판이 됐다'라고 할 때 쓰는 그 난장판의 어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자리를 미리 잡아주는 대행 서비스가 생겨나기 시작했고 이런 서비스를 해주는 사람들을 일컬어 '선접(先接)꾼'이라 불렸습니다. 자리다툼을 하다 맞아죽거나 깔려죽는 선접꾼도 많았기 때문에 선접꾼은 보통 조선시대 목숨을 건 아르바이트로 불렸으며 명문 대갓집의 경우엔 수십~수백 명의 선접꾼을 고용해서 미리 여러 자리를 독식하기도 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과거시험 응시자가 점점 늘어나 18세기 이후부터는 경쟁이 더욱 치열해졌고, 자리를 맡는 선접꾼 외에도 문제를 빨리 풀어 응시자에게 알려주는 '거벽(巨擘)', 서예 솜씨가 뛰어나 거벽이 가져온 답안을 답안지에 옮겨 쓰는 '사수(寫手)' 등 분업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돈 있는 권세가의 자손들이 이런 팀플레이로 합격하기 시작하자 일반 사람들도 아예 팀을 이루고 분업을 해서 과거를 보는 일이 횡행했습니다
이렇게 근엄한 평생도도 김홍도의 풍속도에서 보는 것처럼 과거시험의 위선과 모순을 꼬집는 풍자적인 모습으로 그렸던 데에서 매우 민화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는 그림입니다. 위의 그림은 따라서 과거시험장에서 팀워크를 이루며 집단 토론 형식으로 시험에 응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선접꾼, 거벽, 사수 등이 단 한 명의 소과 응시자를 위한 한 팀이 되어 그야말로 난장판을 이룬 과거장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傳 김홍도 <소과응시>
傳 김홍도 <소과응시>. 중앙박물관
4. 응방식(應榜式), 삼일유가(三日遊街)
<응방식>. <삼일유가>라고도 함
이 그림의 원래 제목은 <응방식(應榜式)>이라고 되어 있는데 흔히 <삼일유가<三日遊街>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삼일유가>란 왕으로부터 받은 어사화(御史花)를 꽂은 급제자들이 악사와 광대, 재인을 앞세워 3일간 거리를 행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응방식>은 말 그대로 과거에 응시하는 것인데, 그림의 내용은 <삼일유가>를 담고 있습니다. <응방식>이 곧 <삼일유가>라는 해설이 대부분이지만 이 그림은 과거에 급제 한 후의 일이고, 과거에 응시하는 것과는 다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조선시대에 <삼일유가> 의식을 곧 <응방식>이라고 하였다는 기록도 찾지 못하였습니다. 어쨌든 이 글에서는 그림의 내용을 중심을 언급하겠습니다.
이 그림의 원래 주인공이었던 모당 홍이상 선생은 1573년(선조 6) 사마시를 거쳐 1579년 31세에 과거(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하였습니다. 아마도 그의 일생에 있어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과거 급제한 자에게는 특별히 3일 동안의 휴가를 주어 그간 마음을 써 주었던 일가친척이나 선배 급제자들을 방문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자신을 뽑아준 시험관도 방문하여 인사드리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때 그냥 단순히 방문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 위에 종이로 만든 다홍색, 보라색, 노랑색 세 가지 빛깔의 무궁화 꽃 어사화(御史花)를 꽂고 관원들이 입는 청삼(靑衫)을 입고, 은으로 명패를 세우고, 앞에서는 풍악이 울리는 가운데 백마를 타고 거리를 행진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의 유가(遊街)라고 한 것입니다. 유가란 일종의 거리 행진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평생도에서는 붉은 가리개를 든 세 명의 길잡이가 앞장섰고(그림에서 이들은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그 뒤를 삼현육각의 악대들이 따랐으며 어사화를 쓴 장원급제자가 당당하게 백마를 타고 이들을 뒤따릅니다. .
그림 속에 과거에 급제한 젊은 선비는 의기양양하게 목을 한껏 뒤로 젖히며 행진합니다. 개천변 길에는 행진하는 것을 구경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와 과거 급제한 선비를 바라보며 축하해 주고 있습니다. 조선 시대의 선비들의 꿈이 과거 급제였는데 거기에 장원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부러웠겠습니까. 아마도 이 선비가 사는 곳을 지나갈 때에는 동네가 온통 축제 분위기였을 것입니다. 세상을 다 얻은 듯한 선비의 표정에서 이 <평생도>를 그리게 된 원인을 제공해 준 과거 장원 급제의 영광, 그리고 그것이 가져온 선비 집안의 부귀영화와 자손의 번창이 눈에 보이는 듯합니다.
傳 김홍도 <모당 홍이상 평생도> 중 응방식. 중앙박물관
5. 한림겸수찬시(翰林兼修撰時) - 최초의 벼슬길
과거에 급제하고 한림겸수찬(翰林兼修撰)이라는 벼슬을 받고 부임할 때의 그림입니다.
이것이 최초로 받은 벼슬로 알려져 있는데, '한림'은 예문관(왕의 말이나 명령을 대신하여 작성하는 것을 담당하는 관서로 오늘의 청와대 연설비서관과 비슷)의 정 8품 대교(待敎)와 정 9품 검열(檢閱)의 별칭이며, '수찬'은 홍문관(서적의 관리와 왕에 대한 자문을 담당)에 소속된 정 6품 관리입니다.
이 두 관직을 겸직한 것이라기보다는 예문관 한림을 거쳐 홍문관 수찬에 오른 벼슬의 과정을 한 그림에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주인공의 정확한 최초의 벼슬은 예문관 한림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실 이 벼슬은 둘 다 궁궐에서 근무하는 것이고 따로 임지에 부임하는 것은 아닐 텐데 이렇게 부사가 부임하여 행차하는 것으로 묘사한 것은 상징적인 표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평생도> 모든 곳에서 중요 벼슬을 임명받을 때 행차하는 것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림에는 과거 급제 후 첫 발령을 받은 관리가 청색 관복을 입고 두 명의 말구종이 이끄는 백마를 타고 행차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은 <모당 홍이상 평생도>와 차이가 많이 나는데, 우선 전체적인 그림의 구도가 서로 정 반대입니다. 개울에 물오리도 원본에는 있으나 이 그림에는 보이지 않고, 가옥의 묘사에서도 많은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원형에서 가장 변형되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